사순절 제1일(2/22 수) 호세아 6:1-3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절제하는 삶을 지내는 40일간의 영적 절기입니다. 이 사순절은 항상 수요일에 시작되고, 이날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합니다. 재는 참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날은 '참회의 수요일'이라고도 합니다. 참회는 주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돌아서지 않는 참회는 참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참회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은 영적인 음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세속적이고 인본적인 생각과 생활에 젖어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세상에 빠진 아내 고멜에게 "이제 집으로 돌아갑시다"라고 외칩니다. 호세아가 아내에게 말한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 나에게로 돌아오라." 우리는 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생활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고쳐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순절의 하루하루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참회의 날들이요, 회복의 걸음입니다.사순절 제2일(2/23 목) 사무엘상 12:20-21 '여호와를 따르라'
얼마 전 비슷한 시기에 이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세상에 빠져 돈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데 온 힘을 다 쓰며 살다가, 허탈함을 느끼고 주님께 돌아온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세상적인 쾌락에 빠져 살다가 건강을 잃고 후회하는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미신에 속아 재산을 빼앗기고 심신이 망가진 사람입니다. 한밤중 도심에 나가 보면 점을 쳐 주는 상점이 즐비합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상점에 앉아 오늘의 운세를 묻고 점을 칩니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소리, 손짓, 신호들이 가득합니다. "나를 따르라. 나를 믿어라, 나를 섬겨라." 조심해야 할 유혹들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여 백성들에게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혹시 헛된 것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주님만 믿고,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만 섬기고, 주님만 따르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사순절 제3일(2/24 금) 시편 128:1-2 '여호와를 경회하라'
콜린 파월은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는 자메이카 부모를 둔 이민 2세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집안이 매우 가난해서 시간당 90센트짜리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성적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는 늘 '나는 모르지만 누군가는 나를 보고 있다'라는 마음을 간직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합니다. 이런 자세로 유색인종이라는 한계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미합참의장을 거쳐 국무장관을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는 마음으로 삽니다.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Coram Deo) 이것은 언제나 경건하게 살기를 힘썼던 종교개혁가들이 가졌던 마음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이 늘 가지셨던 마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존전에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를 통하여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십니다. 사순절 제4일(2/25 토) 이사야 55:6-7 '여호와, 그 이름을 부르라'
과거 중동의 황제들은 공을 세운 신하들이나 외국의 귀한 사신들이 황제를 알현할 때면 흥미로운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아'하고 입을 벌리라고 요청하고는 준비된 황금이나 선물을 그들의 입에 넣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기도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는 조지 뮬러는 말했습니다. "이 땅에는 단 한 가지 종류의 빈곤이 존재한다. 그것은 기도의 빈곤이다." 기도 부족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를 향해 "너희는 여호와를 부르라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그가 너그럽게 하시리라"라고 외쳤습니다. 의인도 악인도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전심으로 찾고 또 찾으면 반드시 만나 주십니다. 어린아이가 다급할 때 "아빠"를 부르듯이 하나님 아버지를 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긍휼의 손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순절 제5일(2/27 월)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을 사랑하는 길'
'좁다'라는 말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안정감을 주지 못합니다. 좁은 길은 동굴 속에 난 길처럼 허리를 숙여야만 갈 수 있는 길이며, 산 위의 절벽처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또한 좁은 길은 나의 모든 짐을 버려두고 몸만 들어가야 하는 작은 길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이 작고 협소한 길을 바로 여러분에게 가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좁은 길은 예수님을 잘 믿는 길,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길,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황제숭배를 거부한 일로 붙잡혀 로마로 호송되었습니다. 교우들이 이 일을 듣고는 구명운동을 벌이자, 그는 교우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로 하여금 맹수의 밥이 되어 하루 속히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두기를 바랍니다. 나는 오직 예수님만을 원합니다. 악마의 쇠뭉치든지, 죽음의 뜨거운 불이든지 오직 예수님, 예수님만을 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은 생명과 진리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좁은 길을 사랑하는 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르는 길입니다.
사순절 제6일(2/28 화) 마태복음 16:25 '생명을 걸고 가는 길'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 안에 참 생명력이 넘칠 때는 온갖 고난과 핍박이 있을 때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음 앞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철저하게 '순교의 정신'으로 살아가야만, 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순교의 정신은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을 매일 죽이는 것입니다. 나의 말, 나의 행동, 나의 생각,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 순교의 삶이 배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죽음을 눈앞에 둔 순교의 현장에서 기꺼이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3세기 한 교회 교부는 "한순간에 고통당하는 이는 오직 한 번 승리한다. 그러나 항상 고통 중에 머물고 끊임없는 고통과 투쟁하는 이는 매일 새로운 순교의 화관을 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매일매일 삶 속에서 자신 안에 있는 죄악 된 나를 죽이는 삶이 바로 참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사순절 제7일(2/29 수) 요한복음12:24-25 '내가 죽어야 사는 길
봄이 되면 꽃들은 새로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 자신의 씨를 바람에 날리거나, 땅바닥으로 떨어뜨립니다. 이렇듯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새로운 생명을 꽃 피우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일부를 버려야 합니다. 그 소중한 일부는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낳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이제 뱃속에서 밖으로 내 보내야 합니다. 이 일이 뱃속의 자녀에게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셨다"라는 말 속에는 그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버리시고 떨어뜨리셨다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 보좌로부터 이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버리는 희생의 삶이 곧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는 삶입니다.
사순절 제8일(3/1 목) 마태복음 22:1-14 '부르심을 따르는 길'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게 하시며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분은 이 세상에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 온 인류를 구원의 길로 초대하는 일 또한 세상의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의 자리, 생명의 자리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초대받았을지라도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결코 생명과 구원은 얻을 수 없습니다. 부르심의 자리에 나아갈 때에만 우리는 그 부르심에 합당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부르심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나에게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사명을 감당하려는 굳은 마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는 합당한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부르심에 순종하는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말씀 가운데, 찬양 가운데, 기도 가운데, 여러 가지 환경의 인도하심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까?" 물으실 때 "주여,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함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길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순절 제9일(3/2 금) 마태복음 26:26-28 '고난에 동참하는 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친히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의 공생애를 보내실 때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고난과 핍박 가운데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이 '성화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기억하며 도와주며, 나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 내는 삶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수도자 안토니는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라, 집에 돌아가 즉시 2백 에이커가 넘는 비옥한 농원을 처분하여 빈민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기도와 단신과 노동의 생활을 하며 남은 삶을 보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사순절 제10일(3/3 토) 마태복음 26:39-41 '깨어 걷는 길'
자동차를 운전할 때 졸음운전은 대형 사고를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 됩니다. 신앙인의 삶도 여기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빨리 달리는 자동차와 같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커다란 문제, 어려움, 시련이 올 때 그 길을 믿음과 기도의 핸들을 이용하여 잘 피해야 하는데, 그 순간 우리의 신앙이 잠을 자고 있다면 믿음과 기도의 핸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 가고자 했던 사람들은 신앙이 잠을 자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깨어 있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깨어서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 할 일은 오직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엮어야 합니다.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길 위에 설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은 잠을 자고 있지는 않습니까? 잠을 자고 있는 여러분의 영혼을 기도로 깨우시기 바랍니다. 깨어 있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순절 제11일(3/5 월) 마가복음 5:25-29 '예수님을 만나 치유된 여인의 믿음
'혈루증'은 태어날 때부터 혈액 응고 인자가 결핍되어 나타나는 선천적 출혈성 질환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열두 해 동안 많은 괴로움을 겪었고, 병을 고치기 위하여 가진 재산도 다 허비하였지만, 병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낙심허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뒤에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믿음대로 혈루 근원이 마르고 깨끗하게 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병을 낫게 하고 구원을 받게 합니다.
미식축구에서는 태클(부딪침)이 생명입니다. 온몸으로 부딪치는 강한 태클만이 경기를 이기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피하거나 도망가면 패배합니다. 우리 인생의 힘든 혈루병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 부딪쳐 봅시다. 이 사순절 기간에 십자가 밑에 나아가 '다' 그리고 '더'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의 손으로 십자가를 만져 봅시다.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 제12일(3/6 화) 누가복음 7:12-15 '예수님을 만나 회복된 여인의 소망'
과부의 독자가 죽은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입니다. 유대인은 죽은 당일에 장례를 하고, 묘지는 보통 성 밖에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여를 멘 행렬과 과부 어머니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 하시고는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말씀하셨을 때,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살리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십니다.
인간에게는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죽음과 세금과 외로움이 그것입니다. 특별히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다 죽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여러분의 모든 소망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사순절 제13일(3/7 수) 누가복음7:36-38예수님을 만나 헌신의 기준이 된 여인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소홀히 대하는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한 여인은 모든 비난과 눈총을 무릎쓰고 최고의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뒤에 서는 겸손, 눈물로 발을 적시는 회개, 자기 머리털로 닦는 헌신, 발에 입 맞추는 사랑, 아낌없이 향유를 붓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에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그저 부족하고 모자라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어떤 비난과 공격과 불이익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면 아깝지도, 무겁지도, 멀지도, 춥지도, 두렵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아까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최고의 사랑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셨기에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사랑하고 생명을 드려야 할 차례입니다. 이제는 나의 결단만이 남았습니다.사순절 제14일(3/8 목) 마15:21-28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은 이방여인
가나안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하여 '개'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오히려 자족했습니다.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려는 겸손과 부스러기로도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넉넉한 믿음, 그리고 인내력을 갖추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는 칭찬과 귀신들린 딸이 고침을 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글을 많이 썼고 "100년만 지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게 되고, 100년 안에 성경도 사라진다"라는 연설을 했으나, 생의 마지막에서 그는 "아! 나는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구나"라고 절규하며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부정하고 교만하게 사는 사람은 어리석고 비참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안개와 꽃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시듭니다.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만이 영원하십니다.사순절 제15일(3/9 금) 요4:24-26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난 여인'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고 심지어 그 땅을 밟지도 않았습니다.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은 과거에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함께 있는 자도 자기 남편이 아닌 윤리적으로 타락한 여인입니다. 누구보다도 많은 고통과 상처와 죄책감에 눌려 사는 불쌍한 여인입니다. 이러한 여인이 야곱의 우물에서 메시야 예수님을 만남으로 죄 사함과 구원의 감격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내던지고 동네로 들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쳤고, 이 여인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메시야는 우리를 우리의 죄악, 상식, 교만, 장소, 혈통, 그리고 정죄에서 끄집어내셔서 구원의 감격을 누리고 나구게 하십니다. 십자가는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모든 장벽과 장애물을 십자가로 무너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라도 거절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용서와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만난 메시야를 우리 또한 이 사순절 기간에 반드시 만나고 모든 사람이 듣도록 전해야 합니다.사순절 제16일(3/10 토) 요8:7-11 '예수님을 만나 새 생명을 얻은 여인'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난 군중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모두 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시며 용서와 관용을 보여 주셨습니다. 정죄가 아닌,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의 참 모습입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에게도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루에도 수없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로 죄 사함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행운이고 선물입니다. 여기에 내 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100%주님의 공로입니다. 이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내 생명을 다 바쳐서 충성하여도 만분의 일조차 갚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 은혜를 갚기 위해 우리 모두 용서와 선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최고의 은혜이고 축복입니다.사순절 제17일(3/12 월) 삼하7:9-12 '그리스도, 하나님의 약속'
다윗은 왕궁을 짓고나서 초라한 모습으로 있는 하나님의 성소를 바라보며 성전을 건축하려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 마음을 가상히 여긴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귀한 축복의 말씀을 약속으로 주셨는데, 다윗의 후손으로 하여금 왕을 세울 것이고, 그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것이며,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 약속이 아들 솔로몬에 대한 말씀인 것으로 생각하고 후일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었고, 그를 통하여 이루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성경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약속은 무엇입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보다 더 큰 약속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순절 제18일(3/13 화) 마21:1-5 '그리스도, 우리의 기쁨'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이미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오래전에 예언되었던 사실입니다. 스가랴 9:9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이루신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미 나귀를 타지 않으시고 새끼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을 나타내심이요, 자신의 높음을 드러내지 않고 낮아지셔서 함께 울고 함께 웃기를 기뻐하는 분이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된 행동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겸손한 왕이시라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은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으며, 주님 안에서 위로받고, 새 힘과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순절 제19일(3/14 수) 요 8:12 '그리스도, 우리의 빛'
예수님께서는 횃불로 도시를 밝히는 화려한 축하 행사가 진행되는 초막절 절기가 끝난 바로 직후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셨습니다. 단순한 빛이 아니라 '온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유대인만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하여 성육신하셨음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빛' 곧 장차 도래하실 메시야 되심을 유대인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역설적으로 이 세상과 사람들이 어둠에 상태에 처해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엡 5:8).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 되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는 자만이 생명의 빛, 즉 영생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 빛 되신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을 향하여 '세상의 빛'(마 5:14)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을 통하여 세상이 보다 환해지기를 원하시는 말씀입니다. 사순절 제20일(3/15 목) 요10:11-15 '그리스도,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양들을 어제나 오늘이나 인도하고, 인내하며, 다스릴 뿐 아니라 보호하고, 양육하십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것과 같이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을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이끄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죄악 가운데 살고 있는 양들을 위하여 그 누구의 강요나 설득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진정한 구원자이십니다(막 10:45).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악한 유대 지도자들과는 본질상 다른 분이십니다.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이 세상에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양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한 원주민 부족은 저녁에 자신의 양을 우리에 넣을 때면 한 마리, 한 마리 이름을 불러 확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이 병이 들게 되면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주인이 불러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치 양과 같아서 우리의 영이 병들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고 참다운 예배자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 제21일(3/16 금) 눅19:38-40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예수 그리스도님을 바라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성경은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으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지금 나는 사순절을 지내며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묵상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지난 해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그 여파로 몰려온 쓰나미를 통해 자연으로 인한 재앙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경험했습니다. 쓰나미에 따른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는 물론이고,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누출 사고로 지금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사고로 방사능에 오염된 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고,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연의 재앙 앞에서 인간은 평화를 지켜 낼 수 없는 초라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를 만드는 하나님의 귀한 청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순절 제22일(3/17 토) 히4:14-16 '그리스도, 우리의 제사장'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이 열납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졌다는 점이고, 둘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유혹받을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긍휼히 여겨 주신다는 점입니다. 혹시 주님은 내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시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1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사순절에 우리의 제사장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어떻게 묵상하고 있습니까?
겸손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세 번째 단계가 '완전한 겸손'입니다. 완전한 겸손은 하나님께 존경과 영광을 드리고자 부귀보다는 가난을, 명예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업신여김당하기를, 세상 것에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으로 보이기보다는 그리스도처럼 천대받기를 바라고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가운데 실천하신 것은 완전한 겸손이셨습니다. 그분이 나의 처지를 잘 아십니다.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의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묵상합시다.사순절 제23일(3/19 월) 고전1:26-29 '약할 때 강함을 주시는 예수님'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던 때 세상에는 지혜와 강함을 자랑하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지혜를 자랑하던 자들은 헬라 사람들로서 그 철학과 문학은 여전히 자신들의 지혜를 뽑내고 있었습니다. 또 로마 제국은 강한 군대의 힘으로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 앞에서 뽑내고, 강한 자가 약한 자 앞에서 으스대는 현상은 유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너느 각도로 보나 지혜롭지도 않았고 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들은 세상의 지혜자들과 강자들을 압도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하루에 삼 천 명이나 세례를 받았고, 결국 로마 제국도 복음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도 처음에는 사람들로부너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무시를 받았으나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강한 분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지혜자가 되고, 강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약함을 변화시켜 강하게 하십니다. 에수님은 우리가 약할 때 강함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순절 제24일(3/20 화) 히2:14-18 '시험을 이기게 해 주시는 예수님'
어느 교회에 아기를 잃어 몹시 슬퍼하는 젊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고, 장례를 집례하는 목사님의 말씀조차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한 권사님이 이 여인을 가만히 안아 주면서 말했습니다. "그만 울어요. 나도 이 나이가 되도록 살면서 벌써 자식을 둘이나 먼저 보냈다오!" 그러자 여인은 울음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슬픔을 겪어 본 권사님의 위로가 '참 위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위로가 '참 위로'가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먼저 세상에 계시면서 우리 인생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아픔, 슬픔을 몸소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형편을 가장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참으로 도우실 수 있는 구주십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곁에서 우리의 고통에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25일(3/21 수) 시46:7-11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
그림 그리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주제는 '평화'였습니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평화를 나타낼 수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상 후보에 최종적으로 두 그림이 올랐습니다. 하나는 고요한 호숫가의 마을 풍경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보는 이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또 다른 그림은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한 바위가 있고 그 아래 새 한 마리가 피해 있는 장면의 그림이었습니다. 두 그림 모두 훌륭했습니다만, 심사위원들은 후자를 대상으로 선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 그림처럼 평안하기만 한 삶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바위틈에 피한 새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시편기자들이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고백했습니다. 10절에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홍해에 가로막히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급박한 상황에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했던 말이었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와중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시고,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이십니다. 사순절 제26일(3/22 목) 대하20:20-23 '구원병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
성도의 계산법은 세상 사람들의 계산법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계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의 뒷면에 있는 것을 포함하여 계산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바로 그것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에 '더하여 주시는 알파'이십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맞설 때, 골리앗은 어린 다윗만 보았지만 사실은 다윗 곁에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남 왕국의 왕 여호사밧 당시에 모압과 암몬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대군이었습니다. 이때 여호사밧은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했고, 찬양대를 앞세워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복병을 두어 적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전쟁에서 뜻밖의 복병은 상대방을 좌절시킵니다. 그러나 같은 편에게는 구원병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적들에게는 무서운 복병이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구원병이십니다.사순절 제27일(3/23 금) 습3:14-17 '화를 당하지 않게 하시는 예수님'
환자가 병원에서 진단을 받을 때 낙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진단만 하고 끝내기 않습니다. 반드시 처방을 내려 치료를 해 줍니다. 주사와 약을 투여하고, 혹은 수술을 합니다. 병원에 올 때는 절망했지만, 의사의 처방에 잘 따를 때 건강해져서 퇴원합니다. 마찬가지로 남 왕국 유다는 무서운 병을 진단받은 환자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뛰어난 명의처럼 백성들에게 처방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형벌을 제하시고, 원수를 물리쳐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화를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들도 죄악이라는 무서운 세균에 감염된 환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를 치료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보혈로 우리를 치료하여 우리가 죽음의 화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십니다. 사순절 제28일(3/24 토) 마11:28-30 '참된 쉼을 주시는 예수님'
오래 전 한 목사님이 청년들과 지리산 등반을 갔다가 조난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새벽 1시가 되어도 하산하지 못한 일행들 중 여학생 한두 명이 매우지치고 힘들어 했습니다. 그때 인솔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배낭을 대신 지는 일이었습니다. 무거운 배낭들을 대신 져 주었던 목사님은 깊은 계곡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가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습니다.
쉼이란 누군가 우리의 짐을 대신 질 때 주어집니다. 그 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눈에 보이는 짐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짐입니다. 사람이란 마음에 고통이 있으면, 비록 맨몸으로 서 있어도 그 삶이 무겁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비록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가는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에 사랑스런 가족을 떠올리는 기쁨이 있다면 리어카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쉼은 외부적인 짐을 덜어 주는 차원과, 마음의 짐을 덜어 주는 차원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짐을 모두 덜어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 지셨는데, 그 절정의 사건이 십자가입니다.사순절 제29일(3/26 월) 롬8:12-18 '십자가, 하늘에 이르는 능력'
척추카리에스라는 병과 폐결핵으로 11년간 병상에 누워 있어야만 했던 스무살의 아주 불쌍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막과도 같은 인생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하나님을 만난 후, 삶이 180도 바뀌어서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평소에 작자미상의 시 "아프지 않으면"을 애송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보지 못할 성안이 있습니다
아!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그 무엇일 수조차 없습니다
얼마 못할 것 같았던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무려 77세까지 살다가 1999년 10월 27일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는 바로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에 이르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약할 때 강함이 됩니다. 십자가는 약할 때 강함을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입니다.사순절 제30일(3/27 화) 마16:21-28 '십자가, 소유를 내려놓게 하는 능력'
한 가정이 감옥에서 탈출한 죄수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탈옥수가 총을 들고 부부를 위협할 때, 부인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안혹 총으로 위협하는 탈옥수를 마치 친구처럼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탈옥수는 "너는 내가 무섭지 않느냐?"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부인은 자기는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수 믿는 기쁨을 죄수에게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새벽 3시에 침입했던 그 탈옥수는 마침내 오전 10시에 제 발로 교도소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은 1985년 테네시 주 메이슨 마을 나단과 루이스 부부에게 일어났던 실화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제자의 요건을 전제하신 까닭은 그분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어려움과 시험이 와도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히 이겨 내야 합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험당하는 자들을 능히 도와주십니다. 예수님께 나의 문제를 맡기는 순간 주님이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사순절 제31일(3/28 수) 사53:7-9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산헤립 왕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에 가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는, 그날 밤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내셔서 앗수르의 십팔만 오천여 명 되는 군사를 멸절시키시고 유대 나라를 보호해 주셨습니다(왕하19:35-36). 하나님은 히스기야와 유대 나라의 피난처가 되어 주셨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새롭게 사는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절망되고, 낙심될 때마다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46편을 노래하며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유명한 찬송까지 지어 결국은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는 고쳐 주시고, 귀신들린 자는 온전하게 하시며,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고, 죽은 자는 살려 주시는 진정한 피난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마땅히 형벌을 받아 죽어야 할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또한 어떤 문제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사순절 제32일(3/29 목) 롬5:7-11 '십자가, 구원의 능력'
어느 날 김익두 목사님이 모내기를 하는 농부에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천당 가세요." 그때 한 청년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곳에서는 전도를 해도 안 됩니다." 목사님이 이유를 묻자 청년이 말했습니다. "이틀 전에 벼락이 쳤는데 벼락을 때리려면 죄인에게 때릴 것이지 논바닥이 무슨 죄가 있다고 논바닥에 벼락을 때립니까?" 그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청년! 학교에서 선생님이 왜 막대기로 칠판과 책상을 치지?" "정신 차리라고 치는 것이죠." 그 말을 듣자마자 목사님이 정색하며 말했습니다. "정신 차려! 하나님이 논바닥을 때려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다음은 청년 차례야!" 그 말을 듣고 놀란 청년은 바로 교회에 출석했고, 나중에 장로까지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구원방법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세상과 나를 이기게 하시는 중재자이십니다.사순절 제33일(3/30 금) 고전1;22-25 '십자가, 세상을 구하는 능력'
지난 겨울 강릉에서는 2개월 된 풍산개 한 마리가 겨울 한파 속에서 쓰러진 80대 노인을 살린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5시간 넘게 노인을 찾던 가족과 경찰관들을 놀라게 한 것은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영하 10ㄷ 이하로 뚝 떨어진 겨울 날씨에 저체온증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노인의 몸을 녹이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경찰관은 "노인은 모자와 장갑도 착용하지 않은 일상복 차림이었는데 조금만 늦어졌다면 큰 변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노인의 아들은 "생후 2개월 된 강아지가 아버님의 배 위에 앉아 체온을 유지해 준 덕에 생존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의 죽음을 면하게 해 달라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힘써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내가 지옥의 화를 당하지 않고 천국의 기쁨으로 살게 해 주시려고 모진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고 행복해 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사순절 제34일(3/31 토) 갈2;20-21 '십자가, 우리 안에 사시는 하나님'
'친구'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꽃과 같은 친구입니다. 꽃이 피어서 예쁠 때는 다가오고 꽃이 지고 나면 돌아보지 않듯이 자기 좋을 때만 찾아오는 친구입니다. 둘째, 저울과 같은 친구입니다. 저울은 무게에 따라 이쪽으로 또는 저쪽으로 기웁니다. 그와 같이 나에게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 이익이 큰 쪽으로만 움직이는 친구입니다. 셋째, 산과 같은 친구입니다. 산이란 온갖 새와 짐승의 안식처이며 멀리서 볼 때나 가까이 갈 때나 늘 그 자리에서 반겨줍니다. 그처럼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마음 든든한 친구입니다. 넷째, 땅과 같은 친구입니다. 땅은 뭇 생명의 싹을 틔워 주고 곡식을 길러 내며 누구에게도 조건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주님은 우리 곁에 오시고,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예수님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지지해 주는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로 인해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지고 가는 십자가는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을 안겨 줍니다.사순절 제35일(4/2 월) 롬5:3-5 '고난은 위장된 축복'
마치 마라톤을 완주하고 쓰러진 경주자처럼, 경주라는 것에는 엄청난 고난이 따르지만 그 후에 반드시 대가가 있습니다. 경주에 이긴 자에게는 상이 있습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상이 있습니다. 고난은 영광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성도가 없고 고난 때문에 실패한 성도도 없습니다. 성도가 고난에 빠지지 않으면 유혹에 빠집니다.
캐롤리나 루터교회의 목사 요나스 샌델에게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26살 때 아버지와 함께 보트놀이를 갔다가 그녀의 눈앞에서 보트가 뒤집혀 아버지를 잃는 큰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그녀는 이 비극적 고난 속에서 다시금 주를 바라보며 깊은 영감의 찬송을 썼습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의미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는 말씀은 모든 성도의 고백입니다.사순절 제36일(4/32 화) 요17:13-16 '하늘에 속한 사람들'
성도는 이 땅에 살지만 이미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죄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이 땅에서 헤매고 있지만 아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성도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고통스러운 긴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존 스토트는 ‘교회의 이중성’이라 했습니다. 그는 한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른 한 귀로는 하나님의 세계에 귀를 기울이는 성도의 모습을 가리켜 ‘이중청취’라고 했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올챙이 송’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꼬물 헤엄치다 뒷다리가 쏘옥 앞다리가 쏘옥 팔딱팔딱 개구리 됐네”라는 가사입니다. 짧고 단순한 노래이지만 굉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올챙이는 다리가 없으므로 물에서만 꼬물꼬물 헤엄치며 놉니다. 그러나 개구리는 다리가 있으므로 물에서도 헤엄을 치고, 뭍에서도 팔딱팔딱 뛰어다닐 수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세상에서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순절 제37일(4/4 수) 막14:35-36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앞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 현장에서 말씀하신 98개의 단어 중 30개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성공이었고, 구원의 성취였습니다.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은 신약에 총 네 번 나오는데, 모두 순교의 문맥에서 나옵니다. 공관복음에 나타난 세 번은 모두 임박한 죽음 앞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1장에서는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잡힐 것을 예언하였지만 바울은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순교자 폴리캅은 병사들이 그의 얼굴과 몸을 마구 때리기 시작하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소리치고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아빌라의 테레사가 말한 대로 기도를 시작하는 모든 사람의 온전한 목적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기 위해 일하고 준비하며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사순절 제38일(4/5 목) 눅23:42-43 '나를 기억하여 주소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시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시고 걸음까지 정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며 언제나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절대로 잊지 않으시되 내가 회개한 죄는 잊으십니다. 나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죄는 다 잊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영국인 소년이 관리인 아버지를 따라 인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저택에서 기르던 코끼리가 새끼를 낳아 아기 코끼리와 함께 성장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소년의 아버지가 본국에서 근무하게 되어 소년은 아기 코끼리와 이별하였고, 20여 년이 흐른 다음 아버지가 다시 인도에서 일하게 되어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코끼리를 찾아갔습니다. 코끼리는 청년이 된 소년을 잊지 않고 그 큰 몸집으로 달려와 코를 부비며 좋아했습니다.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감당인지 모릅니다. 가장 큰 감동은 주님께서 우리를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의 주님은 죄는 용서하여 잊으시되, 회개한 사람은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여 주십니다. 사순절 제39일(4/6 금) 눅23:32-37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용서는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요청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롬 3;23).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는 주님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십자가의 주님의 기도는 지금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지금도 나를 위해 계속되므로 내가 용서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2006년 10월 2일 미국 펜실베니아의 한 조용하던 마을에서 외부인의 총격사건으로 5명의 학생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은 학생들을 나란히 새우고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학생들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였습니다. 범인은 세상을 용서하지도 않고 자신조차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희생당한 학생들의 가족은 용서의 큰 사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각지에서 온 조의금을 범인의 가족에게도 전달하였던 것입니다. 사순절 제40일(4/7 토) 시86:12-13 '우리의 영혼을 지켜 주소서'
영국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대표 시 ‘인빅투스’(Invictus)는 라틴어로 ‘정복불능’이란 뜻입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는 “좁은 문이 아니어도 좋다 심판 날의 벌도 상관없다 내 운명의 주인은 나다 내 영혼의 선장도 나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무지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육체는 소중히 여길 줄 알면서 영혼의 가치는 알지 못하면 누구나 이런 오만에 빠집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것 가운데 가장 잘 지켜야 할 것은 마음이며(잠 4:23), 영혼입니다. 내 영혼의 선장은 내가 아니며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께 영혼을 맡겨야 합니다(벧전 4:19).
만리장성의 망대의 개수는 약 28,000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긴 성과 망대가 나라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고, 이것 때문에 중국이 평안했습니까? 아닙니다.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이 있었고 수도 없이 나라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됩니다(시 127:1). 하물며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 않으면 세상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결국 파괴될 것입니다. 영혼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내 영혼을 맡기는 것은 가장 큰 지혜이며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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