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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우물파기
임현희 목사 2013-03-31 추천 0 댓글 0 조회 893
사순절 DAY 1(2/13 수) 시51:1-10 '은총의 깊은 회개 시간입니다'
우리 삶 속에 예수님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가장 깊은 어려움 속으로 내려갈지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함께 계십니다. 아토스는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된다. 에수님은 거기서 나를 위하여, 모든 이를 위하여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는 어린양, 구세주로 계신다. 그분은 또 나를 형제애로 인도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으로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존재를 드리고, 또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존재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가장 깊은 곳, "내 나쁜 마음의 심연으로 내려가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내려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사랑에 의해 이끌려 다시 회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기 안에서 죄 된 것과 어두운 것과 악한 것에 대한 저항감을 느끼고, 고통스럽지만 빛과 밝음을 향하여 자신을 변화시켜 가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가장 깊은 곳, 악한 생각과 더러운 생각이 가득한 깊은 곳까지도 내어놓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참회의 수요일, 깊은 회개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은총을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순절 DAY 2(2/14 목) 히12:1-10 '그리스도, 이세상의 소망'
보덴 목장의 상속자였던 윌리엄 보덴은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세계 여행을 했을 때,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심 가운데 다짐의 표현으로 자신의 성경 뒷장에 "남김없이 드리리라!"라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 후 보덴은 예일 대학교에 다니면서 많은 학생들과 함께 성경 읽기와 기도 운동을 하였고,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 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예일 소망 선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중국 모슬렘들의 전도에 초점을 맞추어 지내던 그는 졸업 후에 여러 회사로부터 고액의 급여를 제시받았지만, 선교를 위해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 무렵에 그는 자신의 성경 뒷장에 두 단어를 더 적어 넣었습니다. "물러서지 않으리라!" 보덴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 이입학한 후 선교사로 임명받았습니다. 학없을 마치면 중국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는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이집트를 찾았다가 유행성 뇌척수막염에 걸려, 결국 한 달을 못 넘기고 죽고 말았습니다. 26세의 보덴은 자신의 삶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함을 알고도 성경 뒷장에 두 단어를 더 적어 넣었습니다. "후회하지 않으리라"
 

사순절
DAY 3(2/15 금) 요15:1-16'택하여 세우심을 입는 것은 은총'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생명적 관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택하여 세우심은 첫째, 과실을 많이 맺게 하고, 둘째, 과실이 항상 있게 하고, 셋째, 주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택하여 든든히 세우십니다. 택하심에 주도권을 가지시고 그분의 거룩성에 맞게 신실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나는 택함을 받았는가?" "나를 택하신 목적을 알고 있는가?" "그 목적에 맞는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묻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택하심은 세우심이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며, 그것이 곧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그의 나라에 택한 백성으로 불러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향하여 나아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순절 DAY 4(2/16 토) 막15:37-39 '찢어진 휘장 안의 백부장'
출애굽기 25:8을 보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죄인들을 만나 주시기 위해 지은 것이 성막입니다. 성막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네는 휘장이 있는데, 이 휘장 안으로는 대제사장이 제물을 가지고 1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놀라운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큰소리를 지르고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성막의 예표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찢으심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런 장애물 없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사건인 동시에, 찢어진 성소 휘장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모든 담을 없애 주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찢어진 성소 휘장 너머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 첫 번째 주일(2/17)
십자가는
깊은 은혜로 가는 희망길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저의 신앙을 새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나를 위해 외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더 많이 깨닫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 그 사랑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에 흠뻑 빠져드는 사순절이 되시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합니다.

사순절 DAY 5(2/18 월) 벧후3:8-13 '새 하늘과 새 땅의 은총'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행이 지연되고 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지만, 동시에 시간 안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며, 그분의 때를 이루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이토록 늦추고 계신 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려는 사랑의 결과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우리가 여전히 간절하게 바라는 소망입니다. '주의 날'은 마지막 심판의 날임과 동시에 이 땅 가운데 그분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시는 날입니다.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며,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다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곧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 너머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이미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이 땅에서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순절 DAY 6(2/19 화) 렘6:9-15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십자가 은총'
내 귀에 들려오는 여러 소리들로 인해 한탄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왜 이렇게 어둡고, 소망이 보지지 않습니까?" 괜스레 누군가를 탓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을 때 내면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는 너는 어떠냐?" 오늘 본문도 포도를 따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하나하나까지 샅샅이 찾아낼 만큼 철저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유다 백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했습니다. 백성의 탐욕에 편승해 거짓 선지자들과 제사장들도 헛된 평강만을 외쳤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은 생명력 없는 헛된 메아리 같아습니다. 백성들의 귀에까지 다다르지도 못한 채 그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이야기를 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가증한 일을 행하며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들리지 않는 말씀을 붙잡고 자기만족에 사로잡혀 평강을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인 지각과 그야말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순절 DAY 7(2/20 수) 갈5:1-13 '진정한 자유는 사랑'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원하지만,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역설적으로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서로 종노릇하라!"라고 합니다. 죄성을 따라 인간은 무의미한 욕망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다른 노력이나 공로는 필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그에 걸맞은 영적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주님이 말로 다할 수 없는 대가를 지불하고 자유를 주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무엇인가에 얽매인 종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얻은 자유는 방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를 말합니다. 어떤 강제적인 힘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샘솟듯 솟아나는 사랑의 힘으로 누리며 나누는 자유입니다. 이 모든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사라으로써 역사하는 믿음'(6절)이 있음으로 가능합니다. 이 사랑은 법이요구하는 그 이상의 일을 성취해 냅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이런 사랑만이 인간을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사순절 DAY 8(2/21 목) 사57:14-21 '평강의 은총'
평강은 어떤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참여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존귀하고 영원하며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거룩한 곳에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곧 죄를 통회하고 그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 애통해 하는 자들의 신음 소리를 바로 곁에서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영과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진정한 평강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평강이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지지는 않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즉 악인들에게만큼은 나누어 줄 평화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시는 분'이심을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하나님께서 내게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우리는 오히려 그분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럴 때 겸손한 자의 영과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큰 위로와 평강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 DAY 9(2/22 금) 롬8:30-39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희망'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자들인 성도를 세우심은 그분의 뜻을 성취해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펴늘어 주십니다. 항상 자녀 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마틴 루터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면 누가 우리를 위하리요"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귀담아 들어야 할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양자 삼아 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까지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 주셨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은혜의 선물 역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선포했습니다(32절).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은 우리를 세상이 가만 놔둘 리 없습니다. 세상은 다양하게 우리를 공격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택하시고 모든 것을 다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어려움 가운데에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더 견고해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사순절 DAY 10(2/23 토) 시131:1-3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
시편 131편은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함께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해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다윗은 아주 겸손하ㅔ 하나님 앞에서 고요히 침묵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겸손한 그의 영혼은 침묵 속에서 조차 하나님과 은밀한 대화를 나눕니다. 이 대화를 통해서 겸손한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명령가 지시에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이처럼 기도란 본래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과정이며 이것이 곧 예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라는 것은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그것은 오늘, 지금 이 순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엄마와 어린아이 사이에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기쁨과 평화, 바로 그와 같은 평강과 기쁨, 감사와 감격이 하나님 앞에 서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이러한 예배의 삶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2/24)
십자가는
거듭난 삶으로 가는 희망길입니다.
백합 향기 가득한 성전에서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가슴이 먹먹해져 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고통 가운데 몸을 내맡기신 주님을 생각하면
내게 주신 조그만 십자가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꾸만 자꾸만 뒷걸음질하는 제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집니다.
예수님, 부르기만 하여도 너무나 좋으신 나의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사랑이었음을
나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사랑이었음을
제 마음 그릇에 충만하게 담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으로 오늘도 살기를 원합니다.

사순절 DAY 11(2/25 월) 눅8:22-25 '능력을 힘입는 은총의 통로'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말씀이 능력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데 매우 중요한 일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멸망에서 구원으로, 귀신의 지배에서 은혜의 다스림으로, 공포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깨우는'것입니다. 회오리 바람과 같은 큰 바람과 포도로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이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잠들어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깨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은 곧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깨우는 제자들의 모습이 다급해 보입니다. 바다에 익숙한 자들인데도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하며 주님을 깨웁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세상의 죄악의 바람을 맞으면서 "주님! 내가 죽게 되었나이다. 구하소서"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깨우면 주님은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고 잔잔케 하심같이 구원의 은총과 평안을 주십니다.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돌아보소서! 도와주소서!  '잠잠하라' 꾸짖어 주시고 말씀하옵소서!" 이 깨움의 소리는 주님의 능력을 힘입는 귀한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사순절 DAY 12(2/26 화) 미가6:1-8 '부르심에 응답하는 은총'
"사람아!" "인간아!" 스스로가 듣도록 조용히 불러 보십시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무엇으로 만족시켜 드릴 수 있습니까? 구약 시대에는 '제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열심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물론 제사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왜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그 목적을 점점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미가를 통해 아주 간곡하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루터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믿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이요, 고난당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첫째, 오직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말로만이 아닌 행함으로 나타나는 의로움입니다. 둘째,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능력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에 대해 주의 깊게 집중함으로 "사람아!"하는 부름 앞에 응답해야 합니다.

사순절 DAY 13(2/27 수) 눅13-17 '반대자를 부끄럽게 하는 믿음'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심을 복 왜 주중이 아닌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가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축이 웅덩이에 빠지면 건져 내는데 안식일에 사탄에 매인 하나님의 자녀를 고친 것이 무엇이 문제냐는 지적을 하십니다. 그리하여 반대자들은 다 부끄러워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요나의 박넝쿨'이 생각납니다. 니느웨 성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원망하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네가 수고도 안 하고 키운 박넝쿨을 아끼는데 이 성 안에 있는 어린 생명, 수많은 가족을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도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비난보다는 더 큰 사랑은 그러한 비난을 이겨 내고 비난하는 반대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합니다. 십자가는 최고의 선, 최고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역사 앞에서 강한 자도, 있는 자도, 힘센 자도 부끄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난이나 반대보다도 더 큰 사랑,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 더 큰 섬김으로 반대자까지 부끄럽게 하는 삶이 바로 예수님의 삶입니다.

사순절 DAY 14(2/28 목) 히6:9-12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은총'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때 훈계를 하거나 도닥이면서 진료를 진행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두 가지를 우리의 형편에 맞게 사용하십니다. 그중 위로와 격려로 이끌어 주시는 데 있어 강한 원동력이 되는 것이 소망입니다. 은사가 각각 다를지라도 우리가 부르심의 한 소망 가운데 있는 것은 동일한 은혜입니다. 우리은 이러한 소망을 더욱 풍성히 하기 위해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는 십자가 신앙이 날마다 소망의 풍성함으로 나타날 것에 대해 희망해야 합니다. 십자가라는 동일한 방향으로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또한 소망을 커 가게 하는 아름다움을 가져야 합니다. 처음에는 이런 소망의 담대함을 가졌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열정도 식고, 소망도 작아지게 되며, 염려하고 게을러지는 경우를 봅니다. 그럼에도 확신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대로 살며, 삶의 자리에서 처음 사랑을 회복함은 물론 십자가로 주어진 화평이 깨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함과 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본래성과 믿음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해야 합니다.

사순절 DAY 14(3/1 금) 민6:22-27 '십자가 은혜의 큰 복'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복을 주셨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사장의 축복인 오늘 말씀 속에서 복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간구할 뿐입니다. 둘째, 복은 주실 만한 분이 주셔야 합니다. 즉, 복 줄 만한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셋째, 복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아야 합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 가지면 화가 될 수 있습니다. 넷째, 눈이 보이는 것만을 복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물질적이거나, 소유적이거나 탐욕적인 것은 복이 아닙니다.

  다섯째, 우리가 누리는 복은 신령한 복입니다. 신령한 복은 하나님이 택하여 정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여섯째, 복은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선한 것이기에 나눌 때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일곱째,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 원한다"는 말씀으로 복을 나눕니다. 여덟째,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복은 십자가 사랑, 십자가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십자가 은혜의 큰 복을 누리며 나누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순절 DAY 14(3/2 토) 약5:7-11 '십자가 묵상으로 승리하는 길'
성경에서는 '인내'를 '오래 참음'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오래 참음은 잠깐 견디는 것이 아니라 '오래', 즉 '주의 강림하시기까지'라고 말씀합니다(약 5:8). 예수님도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로"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51).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도 아픔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오래 참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죄인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참아 주셨습니다.

  농부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밭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얻기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역시 열매를 바라고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참되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참되 원망하지 말고, 마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며 참고 견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그의 결말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하심의 결말을 주셨습니다. 잘 참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손해 되게 하시거나 억울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길이 참고 묵묵히 주를 따라 가겠네"라고 고백하면서 십자가를 묵상하며 승리합시다.

사순절세번째주일(3/3) 
십자가는
죄인의 어둠에서 생명의 밝음으로 옮기는 희망길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서
내게 무엇이 있기에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나 생각해 봅니다.
주님, 아무리 찾아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아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랑 내게 주셨나 생각해 보니
주님, 그저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아직 죄인일 때
아직 연약할 때
아직 경건하지 못할 그 때에
예수님이 먼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소중한 나의 예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오늘 나를 있게 했음을
차마 믿을 수 없는 큰 사랑,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사순절 DAY 17(3/4 월) 눅17:20-30 '하나님 나라의 생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의 가장 핵심 주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뜻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는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메시야가 오면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는데, 그 나라는 자신들을 힘 있게 만들어, 영원히 이 땅을 지배하게 할 것이라는 정치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오직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임하는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상관없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첫째, 하나님의 주권이 절대시 되는 나라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순절 DAY 18(3/5 화) 히2:1-4 '흘러 떠내려가지 말라'
히브리서는 환란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시대의 성도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 중에도 물질적인 번영 속에 예수님을 팔아 버리고, 분주함 속에서 말씀을 버리며, 유혹 속에 세상의 풍조에 빠져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가 예수님을 버린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보응이 찾아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예수님으로부터 흘러 떠내려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헬라어로 '떠내려가다'(파라뤼오멘)라는 단오는 "첫째, 배가 난파되어 떠내려가다. 둘째,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 나가다. 셋째, 물이 수로를 흐르지 않고 옆으로 흘러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적으로 물질의 번영, 나태와 태만 속에 큰 구원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면, 영적으로 떠내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 DAY 19(3/6 수) 요일3:18 '사랑의 3단계'
국내 여성 최초 변화, 자기 계발 컨설턴트인 이숙영 씨가 쓴 '스스로를 결정하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윈 박사가 직장생활, 가정생활, 사회생활 등 각 분야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조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이나,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세상살이에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보고서에 의하면 전문적인 지식의 결여로 인한 실패는 15%뿐이고, 나머지 85%의 실패는 모두 인간관계를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면 성공합니다.

  첫째, 사랑은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움직입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힘이 없습니다. 행함이 있어야 힘이 있습니다. 둘째, 사랑은 진실해야 합니다. 사랑은 동적으로는 움직이는 것이요, 질적으로는 진실해야 합니다. 사랑을 하는 데 있어 자기 자랑을 위하여 한하단지, 위선으로 한다든지, 체면으로 하면 위력이 약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사순절 DAY 20(3/7 목) 계14:7 '큰 음성이 들리는가'
일본의 신학자 위무라 간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저주가 있다면 첫째는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것, 셋째는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인간사에는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 한다미, 행동 하나,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속에 담아 두는 모든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우리 삶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에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예배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여기서 심판은 최후의 심판을 말합니다.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을 예배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큰 음성이 들리기를 원합니다.

사순절 DAY 21 3/8 금) 행26:9-23 '주님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만남으로 결정됩니다.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 네 가지를 잘 만나야 하는데, 첫째는 부모, 둘째는 친구, 셋째는 스승, 넷째는 배우자입니다. 이 네 가지 만남은 이 땅에서의 행복을 보장합니다. 그러나 현세와 내세의 행복을 보장하는 만남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이것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발버둥을 쳤던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또한 그는 "오늘까지 내가 서 있는 이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아그립바 왕 앞에 서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대적한 사람이었지만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라고 말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모세가 말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분이 바로 나를 만나 주신 분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내가 만난 이분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매를 맞아도 좋고, 피를 흘려도 좋고, 죽어도 좋습니까? 주님밖에는 없습니다.

사순절 DAY 22 3/9 토) 롬3:19-31 '죽기 전에 남기고 싶은 말'
2011년 10월 5일 애플사의 CEO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2005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연설을 하면서 세 가지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항상 배고픔에 머물자"(Stay hungry). "항상 어리석음에 머물자"(Stay foolish).

  로마서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외칩니다. 이방인도 죄인이요, 유대인도 죄인이요, 전 인류는 다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외칩니다(3:20). 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인인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만 믿으면 됩니다(롬 3:22). 그분만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됩니다(롬 3:24).


사순절네번째주일(3/10)
십자가는
익투스의 고백을 지닌 이들의 특별한 희망길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카타콤에 숨어 예배드리던 성도들은
물고기 그림을 그려 그리스도인의 표시를 삼았습니다.
익투스,
이 암호의 의미는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주님, 오늘 나도 익투스의 고백을 주님께 드립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십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나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이 나의 주님 되심을
포기하지 않는 그런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사순절 DAY 23 3/11 월) 히11:1-6 '구원을 사모하는 무릎'
시편 기자는 시편 119:81-82에서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현재의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반드시 구원을 베푸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오늘보다 내일이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미래적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가능성에 근거를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믿음의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에 이른 것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교만에 사로잡혀 죽음에 이른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시 119:81)하게 하셨다는 고백을 하고, 믿음의 선조들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고백하며 구원받은 자로서의 확신을 갖고 이 땅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소원합니다.

사순절 DAY 24 3/12 화) 시69:13-19 '응답을 구하는 무릎' 
본문은 다웃의 시편으로 그에게 임한 고통의 상황, 즉 수렁, 깊은 물, 큰물 등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간구의 기도는 절망 속에서의 절규가 아니라 고난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을 향하여 "주 만군의 여호와"(69:6)라는 칭호를 고백하게 합니다. 이러한 고백의 기도는 이미 응답받은 것을 믿고 하는 감사의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41.195Km를 달리는 마라톤은 자신의 신체 페이스를 잘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출발 신호에서 부터 있는 힘껏 달리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힘의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경기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나의 아픔과 슬픔, 고통을 가지고 기도하였다고 해도 그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가 차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풀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탄식하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수렁과 깊은 물에 빠져 있을 때, 큰물이 나를 덮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킬 때에도 여호와는 인자하심으로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의 때를 기억하고 은혜의 기도를 잊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순절 DAY 25 3/13 수) 골1:14-17 '사죄의 은총에 감사하는 무릎' 
본문의 저자인 다윗은 결코 죄를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다는 고백과 함께 죄사함을 받지 않고는 결단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진정한 회개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강도를 생각해 봅니다. 그는 살아 생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떤 행함도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숨이 넘어가기 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였고, 자신을 구원하여 달라고 요청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는 사죄의 은총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태어났고 죄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로부터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남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인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죄 된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인간의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전 실존을 걸고 죄에 대한 회개, 즉 자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2000년 전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계속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순절 DAY 26 3/14 목) 눅8:11-15 '합당한 결실을 바라는 무릎'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다음날 아침에 식사를 하지 못하신 채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도중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만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잎만 무성하였지 열매를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마21:19). 그리고 그 무화과나무는 곧 말라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든 사람이든 그에 합당한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당시 팔레스틴의 농경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의 밭들은 대개 기다란 모양으로, 그 옆으로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어 사람들과 나귀 등 짐승들이 다닐 수 있었으며, 또한 밭과 길을 자연스럽게 경계 짓는 가시풀이 심겨 있었습니다. 그 결실은 각각 달랐습니다. 결실은 땅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결과만큼 과정도 중요하며, 또한 그 내용물도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결실을 맺기 원합니다.


사순절 DAY 27 3/15 금) 눅 24:24-27 '고난을 통한 영광의 무릎'
누가복음 24:1-49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50-53절은 승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의 깊은 늪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엄연한 사실을 깨우치기 위해 자상한 방법을 동원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같은 위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나 그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낮고 천한 죄악의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하지만 이 땅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땅이었고, 없는 자들을 무시하는 땅이었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철저하게 피조물로무터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며, 배척을 받으며 짧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무의미한 삶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는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영광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라는 부활신앙으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이 땅에 세우고, 메시야의 대속적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 땅의 삶이 끝이 아닙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순간순간 구원을 이루어 감으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넉넉히 이기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순절 DAY 28 3/16 토) 시130:3-6 '기다림 앞에서의 무릎'
본 시는 고난의 원인이 범죄함에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시인은 이제 그의 영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 여호와의 말씀만을 바라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소망으로 가지며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경외하기를 기다리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간혹 하나님의 은혜에 비해 인간의 노력이 무의민한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 받은 자로서 이 땅을 사랑하며 아끼고 구원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미약하고 연약해 보여도 끝까지 경주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에 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다림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순절 다섯번째주일 (3/17) 
십자가는 행복으로 가는 희망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사 53:5).

고통이 당할수록 익숙해지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고통이 미리 알 수 있어 괜찮게 느껴지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고통이 피할 수 있고 감당하기 쉬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예수님은 이미 고통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 고통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 고통을 피하실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줄 알면서도 피할 수 있으면서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몸으로서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모든 고통을 단 하나의 이유,
나와 당신의 구원을 위해 참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순절 DAY 29 3/18 월) 시39:1-5 '깨닫게 되는 은총'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인생이 몸에 잠깐 자는 낮잠처럼 짧고 덧없음을 나타내는 고사성어입니다. 인생은 한순간에 자나가기에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읊조렸고(전1:2) 욥은 '베틀의 북'(욥7:6)보다 빠른 것이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종말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어리석은 부자'는 많은 양식을 준비하고 자신의 영혼을 향해 '즐기자'고 외쳤지만 그 밤에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인생의 종말과 연한을 아시고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알다'라는 말은 피상적이거나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는 분이시며 우리의 신음에도 응답하실 만큼 섬세한 분이십니다. 그분을 알아가는 우리는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을 가진 연약한 존재이기에 사람에게 영원한 삶을 약속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그 은총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소중하게 살아야겠습니다.

사순절 DAY 30 3/19 화) 신1:29-33 '평안의 은총'
아이가 엄마와 함께 긴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지하철도 타며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아! 힘들다." 이 말을 들은 어른들은 모두 아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큰소리로 웃고 말았습니다. 사실 아이가 할아버지 댁에 갈 때 자신이 한 노력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엄마의 품에 안겨 할아버지 댁까지 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은 실상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길로 인도하실 때 사람이 두 팔로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보호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에서 행하셨고, 이스라엘을 위해 모든 일을 하셨으며, 이스라엘과 함께 싸우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 길을 지시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아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품에 안겨 살아갈 때 이 험한 세상길을 평안히 갈 수 있습니다.

사순절 DAY 31 3/20 수) 골2:12-15 '날마다 승리케 하시는 은총'
어떤 사람이 배추 농사를 지으면 배추 파동이 오고, 고추 농사를 지으면 고추 파동이 왔습니다. 하는 수 없이 도시로 나가 삼겹살 집을 개업했더니 구제역이 찾아왔습니다. 통닭 집으로 전업했더니 조류독감이 유행해서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당했습니다. 때로 우리 인생도, 이렇게 꼬일 대로 꼬여 버린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인생의 어려움을 이기고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로마 시대의 십자가는 식민지 백성들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유대인들에게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미련하고 거리끼는(고전 1:23)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은 로마를 정복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구경거리가 되셨던 예수님께서 오히려 로마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세상의 힘과 능력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쇠락하고 망해 버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날마다 우리를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이 능력을 붙잡을 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순절 DAY 32 3/21 목) 레26:3-12 '평화를 소망하는 은총'
오늘 말씀은 일 년이 언제나 추수때와 같이 풍성하고 넉넉한 모습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안전하게 거주함'인데,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평화'입니다. 성경에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거나 배불리 먹고 마시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질서 있게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평화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기대하며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고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이 평화를 소망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순절 DAY 33 3/22 금) 삼하7:26-29 '성취의 은총'
감사할 조건들을 찾는 것은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찾는 도중에는 기대감이 있고, 찾은 뒤에는 큰 선물과 기쁨이 있습니ㅏ. 소풍 때의 보물찾기는 소위 '꽝'도 있지만 감사 찾기에는 '꽝'이 없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보물찾기 하듯 자신의 삶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을 찾고 감사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 이루어 주실 것인지 어떻게 이루어 주실 것인지 고민하고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은 진실되고 동시에 좋은 것이라 믿고 감사하며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때때로 명확하지 않게 보이기도 합니다. 불합리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도저히 받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참되시기 때문에 감사와 믿음으로 받을 때에 성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의 감사와 믿음의 분량대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순절 DAY 34 3/23 토) 눅19:37-40 '찬송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겉옷을 길에 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12:13)를 외치고 환호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외침은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은 해방의 왕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고만받는 어린양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은 해방의 왕을 원했습니다. 이 함성은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들의 외침으로 찬양을 대신하셨습니다.

  비록 2000년 전에는 잘못된 외침으로 찬양을 대신하였지만 우리는 주님께 바른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찬양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우리는 본분을 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우리느니 본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순절여섯번째주일(3/24) 
십자가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아가는 희망길입니다
예수님, 저는 평소에 제 자신을 내려놓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 생각이 참 중요하고
제 마음이 참 중요하고
제 자존심이 참 중요하고
제가 높아지고, 제 이름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
참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
이 사순절에 나의 주님 앞에서
그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며
이제 저를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것처럼
성령으로 나를 채우기를 원합니다.
주님처럼 낮아지게 하소서.
주님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성령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사순절 DAY 35 3/25 월) 시16:1-11 '예수님은 나의 기업'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에게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그 대신 레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기업이 되어 주셨습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기업이 되시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갈3:29, 벧전2:9). 사순절 마지막 주간의 첫날을 맞아 다음의 질문을 던져 봅니다. "나의 기업이신 , 즉 나를 소유하신 예수님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께서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할 때 진심으로 구원의 감격 속에서 최선을다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도 하였습니다(요6:29). 이 말씀에 비추어 일의 동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동기가 불순하면 실족하여 넘어지게 되지만 동기가 순수하면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공회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라고 외칩니다. 달려갈 길을 다 마칠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합시다.


사순절 DAY 36 3/26 화) 단2:20-22 '예수님은 나의 지혜'
다니엘이 고백하였듯이 하나님은 그분에게 있는 지혜와 능력으로 왕들을 세우시고 폐하시기도 하시며 때와 계절을 바꾸실 뿐 아니라 지혜자에게는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는 지식을 주십니다(단 2:21). 주께서 고난당하신 사순절 기간에 하나님의 모든 지혜를 사모합시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임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현재 나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다릅니다. 깊이와 넓이와 높이에 있어서 질적, 양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의 지혜는 선비와 변론가가 소유한 것이지만(고전 1:20) 하나님의 지혜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양식입니다.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의회에 모여 있던 지도자들은 학문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만 알았던 갈릴리 출신의 나사렛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는 지식과 능력을 발견하고는 내심 놀라워하고 당황해 합니다. 그들에게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지혜였기 때문입니다(행 4:13-14).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지혜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 예수님! 찬양합니다. 

사순절 DAY 37 3:27 수) 시 50:1-6 '전능자가 부르실 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브람이 하갈을 취한 것에 대해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이 99세에 나타나셔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분의 전능하심을 강조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아브람아 네 나이 99세이나 나는 너에게 아들을 낳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클라이맥스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실 뿐 아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롬 10:12-13).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 DAY 38 3/28 목) 사51:1-6 '유월절, 하나님의 공의'
430년간 나그네로서의 종살이를 매듭짓고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의 대장정을 시작합니다. 성경은 유월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출 12:23). "어린 양의 피가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발라져 있으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출 12:27).

  이사야 선지자는 공의를 비로, 구원을 열매로 비유합니다.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를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로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셨느니라"(사 45:8, 61:10-1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죄를 넘어가시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뿌려지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넘어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이십니다.


사순절 DAY 39 3/29 금) 요 19:5-16 '예수님을 보라'
출애굽기 33:11은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함과 같이 여호와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대면은 얼굴과 얼굴을 맞댄다는 의미이며 성경은 더 깊은 만남으로써 얼굴을 보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수위를 높여 자신을 보여 주시지 않는다면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면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자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구하였을 때 예쉼은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본디오 빌라도는 법정에 나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 19:5)라고 비아냥거렸지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36)라고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다릅니까? 주님의 얼굴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고난과 사랑의 주님을 대면하여 바라봅니다. 더 깊은 만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고운 모양, 풍채,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는 순,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으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사랑합시다.

사순절 DAY 40 3/30 토) 행10:34-43 '십자가는 희망'
출십자가 전시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아들이 아버지 은퇴를 기념해 드린 십자가에는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못이 촘촘히 박혀 있었습니다. 또 어떤 십자가는 한 젊은이가 멕시코에서 사온 것으로 모래가 굳어 십자가의 형태를 이룬 것이었습니다. 또 한 십자가는 벼락 맞아 쓰러진 나무 밑동을 잘라 만든 십자가였는데, 십자가 안에 또 하나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비나냥거렸습니다. 심지어 저주를 퍼붓고 침을 뱉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저주를 다 받으시며 십자가 위에서 죽음의 잔을 마셨습니다.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아마 이유가 있었을 거야"라며 서로 속닥거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후 그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지은 죄의 값을 속량하시고, 다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써 하나님과의 화목의 길을 열어 놓으신 의미를 갖습니다. 십자가는 희망입니다. 십자가 없는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부활주일 (3/31) 눅24:5-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예루살렘에 가면 정원 무덤이 있습니다. 그 앞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다른 종교에는 모두 창시자의 무덤이 있지만 기독교는 무덤이 없습니다. 있어도 빈무덤뿐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으 종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항상 매달려 있지는 않습니다. 십자가를 넘어 부활을 경험하는 희망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참으로 무기력하게 죽으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후에 부활하셔서 정사와 평강의 무궁한 더함으로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시면서 살아 계십니다(사 9:6-7).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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