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DAY 1(3/5 수) 요엘 2:1-2, 12-17 ‘이제는 여호와께로 돌아올 때’
오늘은 2014년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째 날인‘재의 수요일’입니다. 성경에서‘재’는 회개와 참회를 상징합니다. 이‘재’는 더 이상 태울 것이 없는, 정화와 순수 자체이자 흙에서 난 우리가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부활의 새 생명을 소망하는 가운데 사순절의 여정을 보내야 마땅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둡고 캄캄한 현실에 압도당해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상 그 모든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복했던 죄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거의 죽어 있었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3절 말씀을 통해 어떤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옷을 찢을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참회하는 상한 마음을 가지고 나오라는 뜻입니다.“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임을 기억하면서 머리에‘재’를 바르고, 또 찢겨진 마음으로 이번 사순절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사순절 DAY 2(3/6 목) 고린도후서 5:20-6:10 ‘자녀답게 그리고 일꾼답게’
어떤 자격을 얻으려면 일정한 시간이나 물질적 대가를 치러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하나님의‘자녀’가 되었기에 오히려 그 자격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여신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 된 은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일꾼 된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바울은 본문 6:3-10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여러가지 수난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수난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오늘 나의 삶에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 능력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경험할수록 더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은혜가 지금 나에게 가득 한 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지금 내 가운데 넘쳐흘러서 복음의 사역이 지속될 수 있도록 애씁시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바로‘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사순절 DAY 3(3/7 금) 이사야 58:1-1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이스라엘 백성에게‘금식’은 자신의 경건을 유지하기 위한 종교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경건생활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만을 위한 금식기도를 하면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금식을 단호하게 꾸짖으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이웃과의 나눔’입니다.
10절 말씀“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의 현대적인 의미는“배고픈 사람에게 네 음식을 나누어 주고, 노숙자들을 돌아보아 주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는 자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9-12절)을 해 주십니다.
지금까지 나의 금식은 어떠했습니까? 이웃을 돌보는 금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순절 동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겠다는 결심을 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내 주위에 허락하신 주린 자, 괴로워하는 자에게 베푸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사순절 DAY 4(3/8 토) 마태복음 6:1-6, 16-21 ‘은밀하게 단정하게’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통해 참된‘금식’에서 나아가 참된‘구제’에 따르는 바른 태도와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자주‘나를’드러내려 하고, 다른 사람들이‘나를’알아주길 은밀히 바랄 때가 많습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기도했던 외식하는 자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지 철저히 점검해 봐야 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나는 누구입니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 때라도 묵묵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은밀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오직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조용한 여정을 계속하다 보면, 그 끝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독과 고난 속에 감추어진 소망을 기억하며 보다 더 은밀하게, 그리고 단정한 모습과 자연스러운 태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계속 이어 나갑시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고난과 슬픔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과 마음을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쌓아 두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 행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하게 그리고 단정하게 드리는 삶을 기뻐 받으십니다.
사순절 DAY5 (3/10 월) 창 2:15-17, 3:1-7‘죽을까 하노라’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알베르 까뮈의『오해』라는 작품의 내용입니다. 한 어머니가 남매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어린 시절의 가난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게 되고, 어머니는 딸과 함께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강변 외딴 곳에서 여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했던 어머니와 딸은 그저 많은 돈을 모으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에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먼 훗날 집을 나간 아들이 성공하여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있는 마을로 와서 자기 신분을 감춘 채 바로 그 여관에 투숙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때와 같이 밤이 깊자 그에게 수면제를 먹여 강물에 던져 버립니다. 그리고는 그의 짐 속에서 발견된 신분증을 보고서야 두 모녀는 자신들이 살해한 남자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며 오빠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모녀는 그들의 죄와 무지함으로 결국 끔찍한 비극을 맞이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그릇된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같이 인간은 너무나도 무지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오해하곤 합니다. 혹시 지금 나의 생각과 판단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다고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서 그 오해를 벗어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택과 행동만이 우리를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과 인도하심을 떠나서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순절 DAY6 (3/11 화) 시 32:1-11 ‘죄의 길을 떠나 여호와의 길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등 수천 곡의 찬송가를 지은 찰스 웨슬리는“주 보혈 날 사심은”이라는 곡도 지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영광스러운 사실과 구원 받은 우리는 새로운 주인을 따르며 순종해야 하는 의무와 동시에 천국 소망을 지니게 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존 맥아더,『슬레이브』).
오래 감옥에 갇힌 내 영혼이 누웠네 / 죄악에 단단히 묶인 본성의 밤 / 당신의 눈은 생기 있게 하는 광선을 발하셨네 / 나는 깨어났고 지하 감옥은 불빛으로 밝아졌네 / 나의 사슬은 끊어졌고 내 마음은 자유로워졌네 / 나는 일어나 나아가 그분을 따랐네 / 나의 살아 계신 머리 그분 안에 나 사네 / 거룩한 의의 옷 입고서 / 저 영원한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네 / 내 구주 인해 면류관 쓰겠네
로마시대 당시 노예라는 존재는 단순히 상업적 자산이요 물건이었기 때문에, 당사자의 의견 없이도 사고팔거나 소유권을 이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노예와 같이 죄에 팔려 끌려가던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해방시키셨습니다. 죄로 묶인 사슬을 끊으시고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 사실을 모른 채 아직도 죄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죄의 노예에서 해방된 존재입니다. 환난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모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합시다.
사순절 DAY7 (3/12 수) 롬 5:12-21 ‘한 사람을 통하여’
아프리카 남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는‘딩카족’이 살고 있습니다. 이 딩카족은 절대 울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삶 자체가 생존에 대한 전투였던 딩카족은 매우 용맹스러운 부족입니다. 그들에게‘눈물을 흘리는 짓’은 최고의 수치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신부의 죽음 앞에서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루에 한 끼도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아이들, 전쟁 통에 다친 상처를 치료받지 못한 채 그대로 장애인이 된 사람들, 한 동이의 물을 얻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아낙네들, 하루 종일 전쟁놀이를 하며 빈둥거리는 아이들...... 이렇듯 암담한 현실 앞에서 절망이란 감정을 외면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그들의 가슴에서 눈물이 흐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수천 번, 수만 번 치다보면 바위도 부서지는 날이 오리라는 믿음으로 그 땅을 품었던 한국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의 아름다운 결실이었습니다. 그의 죽음 앞에 딩카족은 굳게 닫혔던 마음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바로 나,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내 안에 가득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생명에 이르도록 나 한 사람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사순절 DAY8 (3/13 목) 마 4:1-11 ‘40일의 금식 그 이후’
2세기 중반, 로마 제국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불법이었고, 온 나라의 신자들은 투옥, 고문,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비엔나의 집사였던 상투스도 체포되어 그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라고 위협당했지만 그의 결심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그는 로마 정부의 관리 앞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짧은 대답을 제외하고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고소한 사람들은 그가 말문이 막히거나 자신의 신앙고백을 철회하기를 기대하며 그를 계속해서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 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똑같이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그가 존재하는 이유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종교적 칭호 그 이상입니다. 그 칭호는 특히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하고 고백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칭호입니다. 그 고백은 바로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예수님을 기꺼이 따르겠다는 헌신과 메시야를 향한 사랑의 증언입니다.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 다시 태어나 "이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하는 질문의 대답입니다. 이 고백과 대답은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기로 했는지 흔들리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문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 사탄의 시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롯이 이겨 내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순절 DAY9 (3/14 금) 막 1:9-15‘그때에’
'브라질의 성자'로 불렸던 미국 선교사 멜랜드 내외는 깊은 산골에 들어가 선교하며 평생에 걸쳐 네 번이나 그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곳 주민인 풀리오 인디언들은 처음에 멜랜드 내외를 '백인'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그들을 무기로 괴롭혔던 그 허다한 '백인'을 부르던 증오에 찬 명칭 그대로의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멜랜드 내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료봉사를 통해 주민들의 병을 치료하고, 목숨을 구하는 헌신적인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을 부르는 명칭이 어느새 '존경하는 백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멜랜드 내외는 계속해서 풀리오 인디언들의 언어를 열심히 배워 10년 뒤에는 그들과 함께 유창한 인디언들의 말을 구사하게 되었고, 그들의 풍습대로 그들과 어우러져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멜랜드 내외를 '백인 인디언'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은 이들 내외가 부상당한 인디언 소년의 발을 씻어 주고 있었습니다. 이를 구경하던 인디언들이 "인디언의 발을 씻는 백인을 보았는가? 이 사람들은 하늘이 보내 준 사람들이다"라고 말했으며 그때부터 멜랜드 부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신 '그 때',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잡힌 '그 때',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셔서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믿고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사순절 DAY10 (3/15 토) 시 16:1-11‘그분의 그늘 아래’
1892년의 일입니다. 영국에서 한 해 동안 열심히 사역한 무디는 가정과 본래의 사역에 복귀한다는 부푼 마음으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마친 후 무디를 실은 배는 사우스 햄프턴을 떠났고, 출항한 지 사흘 쯤 지난 배는 그만 축이 부러지면서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배 안네는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선원들과 승객들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곧 가라앉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인근에 구조선이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불안한 이틀을 보낸 후 무디는 집회를 열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넘어지지 않게 기둥을 붙잡고 성경을 펴서 읽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시 91:1).
나중에 무디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삶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기도 주에 평안이 찾아왔다. 하나님은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영혼 깊은 곳에서 이런 고백이 나오게 하셨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나는 자리에 눕자 마자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물이 차오르는 배 안에서 함께 기도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배를 구조하셨습니다.
우리가 걷는 이 길에 주님께서 동행하십니다. 항상 주님을 우편에 모신 삶은 그분의 그늘 아래 거하는 삶이요, 그곳은 다름 아닌 전능자의 보호 그늘입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가 가장 안전하게 피할 곳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날개 아래입니다.
사순절 DAY11 (3/17 월) 창12:1-9 '무엇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길을 걷는 여행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처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믿음의 여행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떠남'은 자신의 삶의 터전, 자신이 의지하는 모든 삶의 줄을 끊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여행길에 오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여정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함께 떠난 조카 롯과 다투게 되는 아픔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생각이 앞서서 조급하게 행동함으로 내려갔다가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위기를 만나게 되고, 이스마엘을 낳아 가정이 분리되는 아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러한 수많은 실패를 딛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기록한 창세기 12~25장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두드러지게 반복되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실패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가 오셔서 말씀을 재확인시켜 주셨음을 의미하며, 아브라함은 실패의 아픔 속에서 다시금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여정을 따라가고자 하나, 환경과 상황에 휘둘려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돌아봅시다.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과 같은 영광의 칭호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 DAY12 (3/18 화) 시121:1-8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천지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며,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안에 내가 있음을 봅니다. 나 역시 하나님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내게 있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 그곳에는 언제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한 시인은 꽃밭에 내리는 가는 빗소리를 들으며 '너희들도 이 꽃처럼 맘이 고와라 너희들도 이 물처럼 맘이 맑아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바라보라고 하시며, 이를 기르시는 하나님과 솔로몬의 옷보다 더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이처럼 시선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합니다. 절망적 고통의 삶에서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를 묵상하던 본문의 시인은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거대한 산에 둘러싸여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처럼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를 받고 있음을 노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시선을 항상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결코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 DAY13 (3/19 수) 롬4:1-5, 13-22 '오직 믿음의 의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나 할례나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는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행위나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패할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해졌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능히 이루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그의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의'입니다.
한번, 빌라도가 바라바에게 무죄를 선고할 때 바라바의 표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바라바"라는 영화에서 바라바 역을 맡은 앤소니 퀸은 빌라도가 바라바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순간, 너무 놀라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 얼떨떨한 표정, 감격과 흥분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그의 흉악한 죄로 인해 반드시 죽어야 했을 사형수였기 때문입니다.
이 바라바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죄로 인해 반드시 죽게 되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된 '믿음의 의', 이 생명의 은혜를 잊지 맙시다. 법정에서 꼭 죽는 줄로만 알았다가 죽지 않고 살아 나오는 얼떨떨함, 감출 수 없는 흥분과 감격이 지금 우리 안에 있습니까? 오직 믿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는 열쇠가 아니겠습니까?
사순절 DAY14 (3/20 목) 요3:1-17 '가지는 것과 누리는 것'
예수님의 제자들이 큰 풍랑으로 인해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은 "저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하며 놀랍니다. 제자들은 모든 공포를 없애고 참된 평안과 자유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서도 갈릴리 바다에서 만난 이 폭풍우 속에서는 그 평안과 자유를 하나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귀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다 누릴 줄 아는 법은 아니라는 교훈을 줍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이 영생을 얻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귀중한 영생의 복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로, 그리고 값없이 선물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다 열려 있으며, 누구든지 감사함으로 받기만 하면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문제는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영생의 은혜를 내가 누리고 있느냐, 누리고 있지 못하느냐에 있습니다. 이제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선물로 주신 이 영생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는 사람인가?" 만약 이 은혜를 깨달았다면 절망할 틈이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 평안과 자유를 누리기에도 이 땅의 삶은 너무나 짧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DAY15 (3/21 금) 마17:1-13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을 따라'
작가 트리나 폴러스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서 애벌레의 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습니다. "나를 보렴. 나는 지금 고치를 만들고 있단다. 내가 마치 숨어 버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고치는 결코 도피처가 아니야. 고치는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잠시 들어가 머무는 집이야. 고치는 중요한 단계란다. 일단 고치 속에 들어가면 다시는 애벌레 생활로 돌아갈 수 없느니까.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고치 밖에서 볼 때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야!" 애벌레가 고치 안에서 시간을 가졌듯이 예수님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향해 해야 할 일을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을 따라해 나가십니다.
본문의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해같이 빛나는 얼굴, 그리고 빛과 같이 흰 옷을 입은 모습으로 변형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베드로와 제자들은 변형된 예수님의 모습도,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이야기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알려 주시면서 침묵하여 기다리라 명령하십니다. 손을 대 주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우리도 이처럼 침묵하며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묵묵히 침묵하여 그 길을 걸어가시는 고난의 주님을 따르며 묵상해 봅시다.
사순절 DAY16 (3/22 토) 시19:1-14 '내 입의 말과 묵상이'
'계시'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뜻과 존재를 나타내 보여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모든 종교와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주 우주 만물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한 시인은 낮이 이 사실을 낮에게 말하고 밤이 이 사실을 밤에게 전한다고 하면서, 언어도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그 소리가 온 세상에 퍼진다고 노래합니다. 이 얼마나 멋진 계시의 발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말씀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계시를 발견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생기를 돋게 하고 지혜를 갖게 하며, 영원한 기쁨을 안겨주고, 눈을 밝혀 인생의 좌표와 제한된 우리의 삶을 영원과 잇대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은 우리와 항상 소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입으로 하는 말이나 마음의 묵상이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지금 나와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소통을 원하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사순절 DAY17 (3/24 월) 출17:1-7 '내 마음의 므리바'
금세기에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노먼 빈센트 필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빈센트 필 목사님에게 청년 하나가 찾아와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다니는 직장에는 너무나도 문제가 많습니다. 문제 없는 직장을 하나 소개해 주시죠." 그의 부탁에 목사님은 두말하지 않고 흔쾌히 대답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내가 마침 생각나는 직장이 하나 있는데 지금 내 차에 함께 타고 가시죠." 빈센트 필 목사님은 이 청년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뉴욕 시외로 나가더니 갑자기 공동묘지 앞에 차를 딱 세우고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형제여, 여기가 문제가 하나도 없는 직장입니다. 문제가 하나도 없는 직장!"
우리가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문제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가 없는 곳을 찾기보다는 문제를 바라보는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겪는 내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 뒤에서 우리를 응원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좋은 열매를 기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와 환경에 사로잡혀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고집한다면 하나님을 만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함께 사는 이들과 사랑할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만나는 여러 문제와 여러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사순절 DAY18 (3/25 화) 눅1:26-38 '순종할 수 있습니까'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제자를 삼기 위한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 첫 번재 관문은 '배추 심기'였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장이 지시하기를 배추 뿌리를 하늘을 향햐 심으라고 했습니다. 제자가 되고 싶어 찾아온 두 청년은 밭으로 갔습니다. 한 청년은 수도원장의 말씀대로 배추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심었고 한 청년은 수도원장의 말씀과 반대로 배추 뿌리가 땅을 향하도록 심었습니다. 수도원장은 배추를 심어 놓은 모습을 살펴보고는 두 번째 청년을 불러 말했습니다. "청년처럼 똑똑한 사람은 혼자서 사십시오. 당신은 선생으로서의 자격은 있을지 모르지만, 제자로서의 지격은 없습니다." 순종은 제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때로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는 하나님의 섭리와 말씀에 대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다는 것은, 곧 그 말씀 앞에 내 생각과 내 경험을 내로놓고 그분 뜻에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에 순종할 때 우리 삶의 내면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천사를 통해 잉태의 소식을 듣게 된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고백 뒤 그녀는 빨리 달려가 친족 엘리사벳을 만나 함께 위로와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청하시는 '순종'은 무엇입니까? 순종함으로 얻게 되는 기쁨과 위로를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순절 DAY19 (3/26 수) 시95:1-11 '온전한 예배를 드리려면'
요셉 케이보 목사님은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주의 통치하에 있을 때 아주 유명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학교에서 공산주의를 가르치는 교사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어린 그는 어머니를 따라 주일 아침이면 3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프라하에 있는 교회에 가서 2시간 30분 동안 예배하고, 공원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또다시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3시간에 걸쳐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는 그가 어머니에게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는 그곳에 가야만 예배드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주일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일입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즐겨 해야 합니다.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나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구원의 은혜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굽혀, 경배하며, 무릎을 꿇자"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 은혜를 기억합시다.
오늘 내가 드릴 온전한 예배는 어떠한 예배입니까? 그리고 삶 속에서 드리는 온전한 예배는 어떤 삶입니까?
사순절 DAY20 (3/27 목) 롬5:1-11 '환난에서 소망까지'
미국 로키산맥의 해발 3천 미터 높이에는 수목 한계선 지대가 있습니다. 이 지대의 모든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 때문에 곧게 자라지 못하고 하나같이 마치 무릎을 꿇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들을 '무릎 꿇고 있는 나무'라고 부릅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 무서운 인내력을 발휘합니다. 매서운 바람의 환난과 시련에도 이 나무들은 인내하며 그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들은 바로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다고 합니다. 오히려 좋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 자라나는 나무들로는 최고의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 수 없으며, 시련과 환난 속에서 인내하며 생명력을 이어 온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바이올린만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들려준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없이 편안한 조건에서 지내 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 온 사람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평화는 무조건적인 평화나 조용한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다툼과 환난을 겪은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성도는 환난, 인내, 연단, 소망을 이루는 신앙의 성숙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이 여정을 홀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옆에 그 길을 함께 가는 지체가 있습니다. 그 지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평화로 주님을 소망합시다.
사순절 DAY21 (3/28 금) 요4:5-30 '애타는 간절함 가운데 임한 은혜'
미즈노 겐조라는 유명한 시인이 쓴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1937년에 태어난 이 시인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집단 홍역을 앓은 후, 뇌수막염으로 표현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는 평생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할 거라는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진단이 끝나자 조용히 자신의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는 아들이 눈으로라도 말하도록 돕겠다고 결심합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도움을 힘입어 미즈노 겐조는 길고 긴 인내와 고통의 시간 속에서 자신에게 영생에 대한 갈급함을 채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그렇지는 않아", "그만 우세요"등 수 편의 시를 짓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건강하고 부유한 사람이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비록 약하고 힘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약할 때 강함 되시고,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갈급해 하고, 그 갈급함을 채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되어, 생명의 복음을 아낌없이 나누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는 생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날마다 체험하며, 그 은혜를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갑시다.
사순절 DAY22 (3/29 토) 요4:31-42 '뿌리는 사람, 거두는 사람'
황사의 진원지라 불리는 중국의 마오우쑤 사막에 풀씨를 뿌리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20살의 나이로 이 마을에 시집왔던 여인은 그곳 사막을 사람들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모래 언덕을 오르매리며 매일 씨를 뿌리고 물을 주었습니다. 풀들이 자라서 모래바람을 막아 주어야 묘목을 심을 수 있기에 풀 한 포기 키우는 일에 모든 애정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풀들이 자란 곳에는 묘목을 심고,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 주었습니다. 그렇게 풀씨 주머니와 묘목단을 지고 힘겹게 모래 언덕을 오른 지 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유산과 조산 등 모진 역경을 겪어야 했습니다. 얼굴에 모래가 할퀴고 간 자국이 선명해진 지금, 마침내 그녀는 그녀의 아이들과 80여 명의 이웃과 함께 각종 채소와 동물들이 함께 사는 울창한 숲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양식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으로 참된 양식, 곧 영생을 얻게 된 자들은 복음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리고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요, 기쁨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기쁨의 증언은 믿는 자가 더욱 많아짐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오늘도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갑시다.
사순절 DAY23 (3/31 월) 삼상16:1-13 '무엇을 보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는 그 계획을 이루실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사람들의 잘못으로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문제의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지만 사울의 불순종으로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계획과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 가십니다. 불순종하던 사울 대신 하나님의 마음을 안고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순종하던 다윗을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계획을 마침내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시는 기준은 사람들의 기준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주로 외모를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버지의 눈에는 별로 탐탁지 않았던 막내 다윗의 마음을 보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사람의 외모보다는 마음을 보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며 살고 있습니까?
사순절 DAY24 (4/1 화) 시23:1-6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은 시편 23편을 통해서 자기에게는 없는 것이 두 가지라도 말합니다. 첫째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삼고 사니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어떤 형편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함이 계속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사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두번째로 다윗은 '두려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4절).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골리앗과 같은 큰 문제가 생기면 "너무 커서 쓰러뜨릴 수 없다"고 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사는 사람은 "놓치기에는 너무 크다"라고 하며 믿음으로 골리앗에게 나아가는 다윗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만족하며, 하나님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다윗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사순절 DAY25 (4/2 수) 엡5:6-16 '돌아보지 않는 삶'
옛날, 한 젊은 재상이 슬기로운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해야 정사를 잘 돌볼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그릇에 물을 가득 채워 주며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물을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이 젊은 재상은 물을 흘릴까 봐 매우 조심하며 동네 한 바퀴를 다 돌고 왔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동네 뒤편에서 뭘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물을 흘릴까 봐 아무것도 보지를 못했습니다.""그러면 동네 앞에서는 무엇을 보았느냐?" "물이 넘칠까 봐 조심하느라고 아무것도 못 보았습니다." "바로 그걸세. 돌아가서 그렇게 한눈팔지 말고 백성을 잘 돌보면 훌륭한 재상이 될 걸새."
목적이 있는 사람은 주위를 돌아볼 겨를리 없습니다. 한눈팔 겨를이 없습니다. 오직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한 사도 바울의 말이 그러합니다(빌 3:13-14).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어두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할 의무와 권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왔으면서도 자꾸만 어둠 속에 있던 과거를 돌아보거나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뒤돌아보지 맙시다.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오늘 하루 빛 된 삶을 삽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세월을 아끼며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순절 DAY26 (4/3 목) 요9:1-12,35-41 '일할수 있을 때'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에게서 죄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의 눈먼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만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장 먼저 보신 것은 그 사람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낼 도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맹인 된 그를 고치심으로 때가 아직 낮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할 때, 하나님을 나타낼 때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때, 즉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있음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는 사랑 어린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진흙을 발라 주시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하셨습니다. 눈을 뜨게 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보았으되 믿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일할 수 있는 낮에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일할 수 있는 '낮'을 살고 있는 우리는 영적 맹인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뜰 수 있도록 힘을 내야 합니다. 심판 날, 즉 밤이 오기 전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전할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려 봅시다. 그리고 오늘 그에게 사랑의 수고를 다합시다.
사순절 DAY27 (4/4 금) 히10:5-18 '거룩함을 주신 이유'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기차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세 사람이어서 함께 여행 중인 무리와 한 의자에 동석하게 되었습니다. 긴 여행길인지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세 사람은 이 청년에게 카드놀이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그러자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은 카드놀이를 할 줄 모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할 줄은 알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손 두었다가 무엇을 하시게요?"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손이 제 손이 아니라서요" 세 사람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자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자기가 최근 예수님을 믿게 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신의 몸이 주님의 몸이 되어 자신의 손도 주님의 손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주님의 손으로 카드놀이하는 것을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아 사양한다는 대답을 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은 우리를 영원히 온전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거룩함을 얻은 우리는 온몸과 마음, 그리고 생각조차도 주님을 위해서 사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순절 DAY28 (4/5 토) 시143:1-12 '말씀하소서 여호와여'
본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방향이 흔들릴 때,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그 때 무엇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서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안내합니다. 1-4절에서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고백합니다. 원수로부터 핍박당하여 죽은 지 오랜 자같이 암흑 속에 갇힌 자신의 처지 때문에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마음이 참담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옛날을 떠올리며 주의 행하신 일들을 읊조립니다. 친절한 손으로 자신에게 행하셨던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빠른 응답을 간구합니다(7절). 그리고 그렇게 두려움의 밤을 보낸 뒤 아침에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했던 삶, 그리고 늘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바로 그분께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필요한 것은 일시적인 도망이나 그늘 뒤로 숨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 영적인 귀를 열어 놓고 엎드리는 일입니다. 나의 지나온 인생 가운데 길을 잃었을 때 그곳까지 친히 오셔서 나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시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길의 주인이 되어 주셨고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그 말씀을 심령에 되새기며, 그 가르침대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자의 당연한 자세입니다.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사순절 DAY29 (4/7 월) 겔37:1-1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유다광야에서 읽어 보는 시23편>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독일의 한 대학에 히브리어를 잘 하시는 한 노교수님이 계셨는데, 이분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학을 다닐 때, 쉬는 시간이면 히브리어로 시편23편을 소리 내어 암송하던 유대인 친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도나이 로이, 로 에흐싸르......" 그런데 어느 날 두 사람에게 큰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나치의 핍박을 피해 은신처에 숨어 있던 유대인 친구가 비밀경찰에 붙잡힌 것입니다. 이 교수님은 친구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친구가 탄 트력을 따라갔는데, 갑자기 트럭 밖으로 고개를 내민 친구는 시편23편을 히브리어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가스실로 끌려가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이 교수님도 징집되어 독일군으로 러시아 전선에 투입됐는데, 그만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 총살당할 운명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가스실로 끌려가던 유대인 친구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처럼 히브리어로 시편 23편을 소리 내어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자신도 알 수 없는 용기와 평안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때 사형을 집행하던 연합군 장교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함께 시편을 외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위협적인 상황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평안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른 뼈에 힘줄과 살과 가죽을 덮으시고,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새 생명을 주십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온전한 회복과 새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합시다.
사순절 DAY30 (4/8 화) 시130:1-8 '이유 있는 기다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로스알데 힐이라는 작은 마을에 요한이라는 우편집배원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50마일(약 80Km)의 거리를 와가면서 우편물을 배달하였습니다. 어느 날 요한은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모래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 마을길을 걸어가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비가 오나 ,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수십 년간 이 길을 오갔는데, 나는 앞으로도 이 먼지가 나는 황폐한 거리를 오가며 여생을 보내야만 하는가?" 정말 지루한 인생을 보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깊은 시름 속에서 걷던 그는 무릎을 '탁'치며 말합니다.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으로 하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름답게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다음 날부터 요한은 들꽃 씨앗을 주머니 속에 가득 넣어 가지고 다니며 짬짬이 틈을 내어 그 꽃씨들을 갈가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이듬해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봄이 되자 봄꽃들이, 여름에는 여름꽃들이, 가을이면 가을꽃들이 철을 따라 아름답게 피어났습니다. 휘파람을 불며 우편물을 배달하는 요한의 뒷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나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여정을 어떤 마음으로 보내고 있습니까? 지루함이나 막연함으로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루 하나님의 말씀에 간절히 귀 기울이며 이유 있는 기다림의 매력에 빠져 봅시다.
사순절 DAY31 (4/9 수) 롬8:5-14 '간직할 그 사랑'
1865년 아주 추운 겨울, 눈보라가 치는 날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사우스 웨일즈라는 언덕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 없이 홀로 갓난아이를 안고 가다가 강추위와 눈보라에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눈보라가 그치고 사람들이 여인을 발견했을 당시, 그 여인은 벌거벗은 상태로 아기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아기를 싸매고는 자신은 그만 얼어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목숨을 잃었지만, 아이는 살았습니다. 이 아기는 훗날 장성하여 1916년 제53대 영국수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입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어머니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잊지 않았습니다. 가슴 속에 이 뜨거운 사랑을 간직한 멋진 수상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로 인침 받은 자는 육신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위험이 닥칠지라도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 곧 뜨거운 사랑으로 중보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어려움과 위험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부어 주신 극진한 사랑은 변함이 없고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참 기쁨을 누리며 살아갑시다.
사순절 DAY32 (4/10 목) 요11:17-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헨리 나우웨이 쓴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나라에 왕자 네 명이 있었는데 하루는 함께 모여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 형제가 전 세계에 흩어져서 최첨단 과학 기술을 배워 오자." 그렇게 하기로 한 왕자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먼저 첫째 왕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생물의 뼈 한 조각만 있으면 근육을 붙이는 기술을 알아싸." 이어 둘째 왕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뼈와 근육만 있으면 피부와 털을 돋아나게 하는 기술을 배워 왔다." 셋째 왕자는 "나는 뼈와 근육 그리고 털이 있으면 사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막내 왕자도 이에 질세라 말했습니다. "나는 사자가 만들어 지면 그것에 생명을 불어 넣는 기술을 배워왔다" 네 왕자는 숲 속에 들어가 뼈를 하나 주웠습니다. 그리고는 그 뼈에 근육을 붙이고, 피부와 털을 돋아나게 하고, 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러자 사나운 사자가 일어나 그 네 명의 왕자를 물어뜯어 그만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고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 황당한 이야기를 통해 생명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줍니다. 사자에게 불어넣은 생명은 결국 그들의 생명을 잃게 하였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생명이 모두 진정한 생명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 진짜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오직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얻는 이 참 진리가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믿어지기를 기도합시다.
사순절 DAY33 (4/11 금) 시42:1-11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리더십 분야의 권위자인 스티븐 코비 박사는 그의 책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의 서두에서 결혼 후 셋째 아이를 낳은 다음 자기 일을 하지 못해 불만인 딸과의 대화를 소개하였습니다. 딸이 말합니다. "아버지, 너무 속상해요. 아버지도 제가 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죠? 하지만 이 아이는 제 시간을 몽땅 빼앗고 있다고요. 전 정말이지 다른 일은 하나도 할 수가 없어요. 제가 꼭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은데 말이에요." 이 이야기를 들은 코비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시간 관리 같은 것에 신경 쓰지 말거라. 달력을 잊어버리렴. 다만 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이 아이와의 시간을 즐기도록 해라. 네 내면의 나침반을 따르고 벽에 걸린 시계는 신경 쓰지 말거라."
살다 보면 각 사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내와 역경의 시기를 지나게 됩니다. 너무 힘들고 길게 느껴져 꼭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고난과 불안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코비 박사의 "네 내면의 나침반을 따르고 벽에 걸린 시계는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나침반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자들입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역경의 시기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인생의 방향은 선명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둡시다. 주께서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힘들고 어려운 시간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 DAY34 (4/12 토) 마21:1-11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본문의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그렇게 묵묵히 십자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사사시대처럼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메시야를 기다렸던 군중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척 스윈돌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 중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플로리다에 사는 어떤 할머니가 71세의 나이로 혼자 외롭게 죽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망 원인은 영양실조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23Kg의 몸무게로 목숨을 잃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웃들은 그녀가 돈 한 푼 없이 불쌍하게 살다가 죽어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수사관들이 그녀의 집을 조사하던 중 두 개의 열쇠를 발견하면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개의 열쇠는 은행의 안전금고 열쇠였습니다. 안전금고에는 700개가 넘는 주식 증권과 80만 달러의 현금,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채권들과 유가증권들이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백만장자의 부자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몰랐던 이 할머니처럼, 우리 삶을 구원하시며 진정한 구주 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향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 군중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해야 할 복음은 무엇입니까?
사순절 DAY35 (4/14 월) 사50:4-9 '무엇을 부끄러워하십니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인은 그의 "서시"에서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는 자신을 부끄럽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 위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로 인해 감히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죄는 이처럼 사람을 부끄럽게 합니다. 죄로 인하여 고난과 역경을 당하는 사람도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본문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주 여호와께서 도우시리니 부끄러워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고 오히려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며 무죄를 직접 증명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롭게 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자유합니다.
사순절 DAY36 (4/15 화) 시31:1-16 '고통 중에 임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구세군을 세운 윌리엄 부스 목사님은 젊었을 때 의사로부터 모든 것을 그만두고 쉴것을 권유받았습니다. "이런 병약한 몸으로 계속 목회를 한다면 1년 정도 후에는 사망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십시오." 그러나 그는 1년이라도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열심히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며 구제사업에 힘썼던 그는 84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젊었을 때 의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의사를 버렸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했다. 이 믿음이 나를 지켜 주었다."
다윗은 자신이 고통 중에 있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그는 고통의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여졌습니다. 주위의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친구들조차 자신을 피하게 되었고, 비방의 소리로 인해 두려움에 감싸였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생명의 위협 중에도 주만 의지한다고 고백하며 그의 남은 날이 주의 손에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주의 얼굴을 그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으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죄로 인해 그리고 대적의 공격으로 인해 심한 어려움을 겪을 때, 나의 반석과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합시다.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과 우리의 환난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나의 고통 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임하실지 잠잠히 기대해 봅시다.
사순절 DAY37 (4/16 수) 빌2:1-11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사랑'
피터 드러커는 그의 책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효과적인 리더는 유능하고, 독립심이 강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인재들을 둔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료와 부하들을 격려해 주고, 칭찬해 줍니다. 그는 리더는 계급이나 특권이 아니라 하나의 책임일뿐이라고 보았으며, 독불장군 근성을 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격려해 주며 함께 일할 것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집단에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역량을 발휘하게 하며, 하나 된 마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보았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하나 되기 위해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공동체가 기쁨과 성장을 이루려면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나 되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길 원하십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높여 준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해 보십시오. 구성원들은 이러한 낮아짐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해 보십시오.
내가 낮아질 때, 우리 공동체가 사랑으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바라고, 기뻐하는 성장과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낮아지는 나, 더 사랑하는 나를 통해 우리 공동체에 예수님이 주시는 열매가 가득해질 것입니다.
사순절 DAY38 (4/17 목) 마26:57-75 '닭 울기 전에'
주전 44년, 로마의 정치가요 장군으로서 시저의 절친한 친구였던 브루투스는 시저의 반대파들에게 설득당하여 시저를 죽이게 됩니다. 그때 시저는 "오, 부루투스여 너마저도 나를!"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암살을 당합니다. 시저는 자신이 그렇게 믿고 신뢰한 친구요, 자신이 세운 장군인 부루투스의 배반에 경악을 했을 것입니다. 이 일로 '브루투스'하면 배반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의 입구에는 "여기에 들어오는 자는 일체의 소망을 버려라"는 글이 새겨져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옥의 심연에는 가룟 유다와 브루투스가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있다고 말합니다. 단테는 배반을 가장 큰 죄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성경 속 대표적인 배반자입니다. 스승이었던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하자 마자 곧 닭이 울었고,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겸손해졌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입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더 겸손하게 낮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닭이 울기 전 예수님이 나의 구주, 나의 주인이심을 당당하게 고백합시다.
사순절 DAY39 (4/18 금) 마27:32-54 '십자가 은혜를 기억하며'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십자가 처형법은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땅에 죄인의 발이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해 낸 처형법입니다. 죄인의 고통을 최대한으로 가중시키기 우해 십자가에 매단 후 못을 박습니다. 그러면 못 박힌 곳으로 몸의 피가 서서히 빠져나가며 마침내 죽게 됩니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시체를 공중에 매달아 놓고, 새들이 뜯어 먹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참으로 끔찍한 처형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 제국은 이런 잔인한 십자가형을 자국민들에게는 절대 내리지 않았고, 그들의 노예나 식민지 사람에게만 내렸습니다.
사람들의 조소와 놀림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은 담담히 죽어 가는 어린양처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드러난 여러 가지 징후들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며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그 은혜는 이로 형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고통에 조금이라도 동참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금요일을 보냅시다. 이유 있는 금식, 뜻이 있는 경건의 삶을 결심합시다.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하며 그 은혜에 깊이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사순절 DAY40 (4/19 토) 마28:1-10 '부활의 증인'
어떤 사람이 물건을 훔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판관은 "당신이 그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았다는 증인이 최소한 4명은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그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할 사람 40명을 데려올 수 있습니다." 보았다는 사람과 보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이 증언을 한다면 누구의 말이 더 믿을 만할까요?
예수님의 장례까지 동행한 두 여인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무덤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이르렀을 때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돌을 굴려 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겁에 질려 있는 두 여인에게 천사는 무서워 말라고 하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 예수님의 시신을 굴 속에 넣고 돌로 막아 놓은 것을 두 눈으로 보았기에, 의심에 가득 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두 여인을 향해 천사는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본 것을 증거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달음질 하던 두 여인은 도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빈 무덤을 직접 보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두 여인은 부활의 최초 증인이 됩니다.
증인은 사건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목격하였으므로 증거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증인들의 말을 믿고 부활을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누구에게 부활을 증거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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