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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묵상
임현희목사 2014-12-23 추천 0 댓글 1 조회 2183

대림절 1/ 1130(주일) - 3:17, 22:20 '내가 곧 가겠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지금은 멈춤과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나무들은 이제 물을 빨아들이지 않습니다. 빛을 받아들일 잎도 떨어뜨려 버렸습니다. 그렇게 멈추어서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멈춤과 기다림으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합니다.

   현대 도시생활의 비극은 어쩌면 이 멈춤과 기다림을 상실한 데 있지 않을까요? 겨울을 잃어버렸습니다. 멈추었다가는 뒤처지거나 퇴출당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 시달립니다. 도시의 겨울은 조용히 멈추어 기다리는 계절이 아니지요. 더욱 분주하고 바쁩니다. 이중삼중으로 막혀버린 생활공간에는 이미 겨울이 없습니다. 겨울이 없으니 어찌 봄이 오겠습니까? 봄이 없으니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 말라기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기다림의 책입니다. 말라기는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시기의 예언자입니다. 이스라엘은 기다리고 기다리며 수백 년을 기다려왔지만, 세상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지요. 불의와 타협하고 권력에 아첨하는 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직하게 하나님만을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고통 받고 손해만 보는 세상입니다.‘못된 짓을 해야 성공하는 세상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됩니다. 희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찌 해야 할까요? 이래도 더 기다려야 하나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때야말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할 때라고 말라기는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세상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때도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민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성전은 흔적조차 없이 허물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도 극에 달해서 더 이상 견디어 내기 힘든 때였습니다. 모든 것은 다 끝났다고 신앙을 저버리는 배교의 시대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신앙이 무슨 의미란 말입니까? 그러나 바로 그때에 요한은 기다림의 신앙을 촉구했습니다. 그 역사의 어둠 속에서 빛을 보았고, 그 역사의 파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잠시 멈추는 건 어떨까요. 우리의 마음이 너무 각박하고 우리의 생활이 너무 분주해서 기다림을 잃고 살아오지는 않았나요? 우리의 일상은 너무도 무신(無神)적이고, 너무도 반생명적이지 않은가요? 우리를 멈출 수 없도록 그리도 몰아붙인 것은 또 무엇입니까? 이제는 우리도 멈추어서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대림절 2/ 121() - 창6:8-9, 마24:42 '깨어 있어야지'

탈무드에 나오는 어느 랍비와 예언자 엘리야의 대화입니다.“메시아가 언제 오십니까?”“그분에게 직접 찾아가 물어보아라.”“그분이 어디 계십니까?”“그분은 성문밖에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지금 성문 밖에 있는 수많은 병자들 틈에서 어떻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그분은 상처투성이로 앓고 있는 가난한 병자들과 함께 그들과 똑같은 차림새와 행동거지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다른 병자들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다른 병자들은 자신을 싸맨 붕대를 풀 때, 그것을 다시 감아야 한다는 생각 없이 그저 풀어 버린다. 풀린 붕대가 뒤엉켜 버려도 아랑곳없이 그저 푸는 데만 급급하다. 그러나 그분은 그 붕대가 언젠가는 다시 쓰일 때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푼단.”

  탈무드의 메시아는 성문 밖에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시대에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똑같은 모습, 똑같은 행동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그 존재가 달랐습니다. 같은 모습이지만 그 존재가 다른 사람, 하여 같은 일상을 사는 것 같지만 다른 삶을 사는 사람, 그가 탈무드가 말하는 메시아였습니다.

  두 남자가 밭을 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는 선택 받고 다른 남자는 버림받습니다. 두 남자가 하던 일은 같지요. 두 남자의 차림새도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는 선택 받고 한 남자는 버림받은 것입니다. 또 다시, 이번에는 두 여인이 맷돌을 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여인은 선택 받고 다른 여인은 버림받습니다. 두 여인이 하던 일도 같지요. 두 여인의 차림새 또한 아무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은 선택 받고 다른 여인은 버림받은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요? 이것이 그날이 왔을 때 일어날 일이라면,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도대체 마지막 날에 구원받고 버림받는 그 잣대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두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깨어 있는 것!’그렇군요. 구원받은 그 사람은 깨어 있었습니다. 똑같은 밭일, 똑같은 맷돌질을 하고 있었지만, 한 사람은 깨어 있었습니다.‘깨어 있음으로 그 둘은 같은 일상이지만 서로 다르게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하고 더 빛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가난하고 병든 시대에 우리 또한 상처투성이이고 비루하고 추한 모습 아닙니까? 우리가 하는 일도 붕대를 매고 푸는 진부한 일상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깨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슴을 치며 후회하실 만큼 썩어빠진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던 저 노아처럼 말입니다.

 

대림절 3/ 122() - 암5:8, 살전5:5 '이미 빛 가운데 산다면'

1500년대까지 중앙아메리카에는 아즈텍 제국이 있었습니다. 인구가 2천만에 이르는 제국의 군대는 용맹하고 잔혹한 전사들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이 제국은 1521년에 아주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스페인의 헤르난도 코르테즈가 이끄는 5백여 명의 군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어떻게 코르테즈는 아즈텍의 군대를 이길 수 있었을까요? 그의 병사들이 15백의 신출귀몰할 능력을 갖춘 것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코르테즈는 아즈텍의 신탁을 이용했습니다. 아즈텍 사람들은 장차 그들에게 신이 찾아올 것인데, 그 신은 흰 피부에 긴 수염, 그리고 깃털 장식을 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열두 문의 태포 소리와 함께 코르테즈가 그 신탁의 모습대로 꾸미고 나타났을 때, 아즈텍의 군대는 무기를 내려놓고 그를 신으로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아즈텍에게 옛 신탁이 아킬레스건이었던 것처럼, 기독교에도 신앙을 서고 넘어지게 만드는 것, 그게 무엇일까요? 재림 신앙 아닐까요? 아즈텍 사람들이 신의 겉모습에 몰두하다가 망한 것처럼, 기독교도 재림의때와 시기에 집착하다가 온갖 이단과 사설에 휩싸이지 않았습니까? 일찍이 데살로니가에서도 그랬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신약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인데, 바로 재림 신앙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만큼 재림 신앙은 교회의 오래되고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라고 강조했습니다. 재림 신앙은 악이 승리하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인내와 희망의 토대입니다. 그러나 재림 신앙은 그 때가 언제, 어느 시인지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재림 신앙은 그 때와 시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재림 신앙은 하늘을 바라보며 내일을 점치는 신앙이 아닙니다.

  문제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현재-‘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빛의 자녀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어둠의 자식으로 살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다면, 그 날은 도둑처럼 졸지에 심판으로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빛 가운데 살고 있다면, 그 때와 시기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거나 죽거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서 그 날을 살아가고 있다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17:21)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아니, 지금 그 날을 기다리는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대림절 4/ 123() - 사55:7, 눅15:20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

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모를 때, 여자는 단호하게 주유소에 들어가 용감무쌍 단호하게 길을 묻는답니다. 그러나 남자는 그냥 지나쳐 끝끝내 헤매고 돌다가 기름이 다 떨어지면 그제야 주유소에 들어가 기름을 넣으면서 슬그머니 물어본답니다. 이게 여자와 남자의 다른 점이라나요. 그러니, 혹 남편이 환장하게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혹 아내가 박박 속을 긁더라도 그러려니 꿀꺽 넘어가십시오. 참는 자에게 평화가 있습니다.

  대개 많은 불화의 뿌리를 캐고 들어가면, 거기에는 사소한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이란 본디 서로 다릅니다. 어떻게다른사람이 나와같기를 바라겠습니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역지사지, 그렇습니다. 서로 자리를 바꿔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있습니다. 집을 나가 방탕하게 살면서 모든 것을 탕진한 둘째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아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거부하고 죄악에 빠진 인간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못 먹어 굶어 죽을 상황에 처한 그에게 어떤 기다림이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인간의 참담한 실패와 처연한 현실을 넘어서는 새로운 희망과 가슴 벅찬 은총을 만나게 됩니다.

  이 새로운 희망, 뜻밖의 은총은 어디서 옵니까? 아버지! 그렇습니다. 멀리서도 둘째 아들을 대뜸 알아보고 달려오는 아버지, 그 더러운 화상을 끌어안고 입 맞추는 아버지, 좋은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반지를 끼워주는 아버지 말입니다. 여기 아들의 배반보다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더 큽니까? 아들의 죄악보다 아버지의 은총이 얼마나 더 너릅니까? 이 아버지의 기다림이야말로 얼마나 적절하고 가슴 아립니까?

  어쩌면 이 비유의 초점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에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기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다림을 봅니다.

  대림절,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치기를 기도하는 절기요, 절망의 땅에 하늘의 소망이 내리기를 바라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대림절은 정작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절기가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의 희망은 바로 이 하나님의 기다림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대림절은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통회 자복의 절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림절 5/ 124(목) - 사55:8-9, 막14:36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대림절 다섯째 날입니다. 우리는 성탄을 앞두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지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주께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그 옛날 첫 대림절 때에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맞이하기보다 오히려 박대하지 않았습니까? 대림절은어서 돌아오라고 간절히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절기입니다.

  이사야는 일찍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호소했습니다. 그것만이 살 길이요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곁에 가까이 와 계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돌이키기만 하면 금방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렇게 가까이 계시고 금방이라도 만나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거듭 어긋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이스라엘의 생각, 하나님의 길과 이스라엘의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길은 서로 어긋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같은 길을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길은 결코 같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와 수난을 생각하고 걸어가는 길을 제자들은 영광과 출세를 꿈꾸며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 길은 어긋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다른 길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길에서 누가 더 높으냐는 어처구니없는 다툼을 벌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은 다릅니다. 내 길과 하나님의 길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아득히 멉니다. 이 차이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첫 발걸음이 있습니다. 나의 생각을 꺾지 않고, 내 길을 돌이키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처럼 흐르도록 처절하게 기도하시며내 뜻을 꺾어야 하셨습니다. 내 생각을 고치지 않고 내 길을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길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우리의 뜻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지금 어느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대림절 6/ 125() - 사호6:6, 마23:23  '버리지 말아야 할 것'

어떤 어부가 그럭저럭 고기잡이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돌이 가득 든 자루 하나가 발에 채였습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바닷가에 주저앉아 그 돌들을 꺼내 던지면서 버릇처럼 투덜거렸습니다.“이 돌이 보물이라면 어떨까, 이게 황금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그렇게 마지막 돌을 던지려다 어스름 달빛에 그 돌을 비추어 본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반짝이는 보석이었습니다.

  제 손에 든 보석을 허황된 꿈만 꾸면서 다 날려버린 이 어부, 정말 어리석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석이 제 손에 있는지도 모르고, 마냥 투덜대면서 던져버리는 사람이 어찌 이 어부뿐이겠습니까? 우리도 지금 내 손에 있는 보석을 무심코 던지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손에 있는 보석, 그게 무엇일까요? 우리 손에 있는 것 말입니다. 때로는 너무 익숙하고 편안해서, 언제나 거기 그렇게 있어서, 그래서 그 소중함을 모르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정말 보물이 아니겠습니까? 그중에서도 아마 우리의가족은 그 보석 중의 보석이 아닐까요?

  호세아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가정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고멜은 정부를 좇아 가정을 던져버리지요. 그래서 깨진 가정의 아이들은 사람받지 못하는 로루하마가 되고, 버림받은 로암미가 되고, 거칠고 난폭한 이스르엘이 됩니다. 이것이 이 가정의 불행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이 한 가정의 비극에서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비극을 봅니다.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는 민족이라는 큰 공동체의 향방을 비춥니다. 따라서 거꾸로 호세아는 이 풍비박산난 가정의 회복에서 민족 전체의 구원을 바라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고멜 가정의 회복 없이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고멜의 가정이 깨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멜이 가정을 던져버린 까닭이 무엇입니까? 고멜은 순수한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곡식과 포도주와 금은을 따라갔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 털옷과 모시옷, 기름과 술, 이것이 고멜의 정부가 놓은 유혹의 미끼였습니다. 고멜의 탐욕과 이기주의, 이스라엘의 자본지상주의 맘몬 숭배!

  호세아는 호소합니다. 빈 들로 돌아가자고. 거기에서만희망의 문이 열린다고. 무슨 말입니까? 탐욕과 소유의 우상, 그 지독한 환상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고멜의 가정을 살리는 길은경제에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길 또한경제에 있지 않습니다. 고멜 가정을 살리는 길,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는 길은 다만, 순수한 사랑에 있습니다. 정의와 사랑과 성실에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불행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풍요로운 제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돌아가야 할 빈 들이 있나요? 그곳이 어디인가요? 잠깐! 방금 멀리 던져버린 것, 그것이 뭐지요?

 

대림절 7/ 126() - 잠9:8, 고전1:25  '어리석은 사람, 지혜로운 사람'

잠언은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으로 나눕니다.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을 살펴보니까 어리석은 사람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은 어리석은 사람을 두 부류로 구분하는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어수룩한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어수룩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겠네요.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 첫 특징은, 자신이 잘 안다고, 다 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내가 알고 저것도 내가 했고, 내가 아니면 해가 못 뜨는 줄 압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나대는 것이 어리석음의 면허증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또 교만합니다. 무지하니 용감합니다. 교만은 어리석음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사람은 가르침도 책망도 받을 능력이 없습니다. 책망하는 이를 미워합니다. 가르침도 책망도 소용없다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도무지 돌이킬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또한 하나님도 두려워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조차 자신의 욕심을 위해 복무하는 존재로 알 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니, 사람은 또한 어떻게 보겠습니까? 안하무인! 이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마지막 특징입니다. 특히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무시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함부로 대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 첫 특징이자 마지막 특징은 자신이 지혜롭지 못함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것, 그것이 지혜의 출발점이요 종착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자신이 한낱 인간임을 압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듣고 즐겨 배웁니다. 책망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한낱 인간임을 알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또한 사람을 존중합니다. 힘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어린아이를하나님의 친구로 귀하게 대합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당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 했지요. 어찌 세상의 지혜와 간교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참, 어수룩한 사람 얘기를 하지 않았군요. 잘 가는 것 같다가도 어느 틈에 곁길로 새는 사람이 어수룩한 사람이지요. 어리석은 것만큼이나 겁 또한 무지 많은 사람 말입니다. 그래도 어수룩한 사람에게는 일말의 희망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니까요. 날마다 가르침을 떠나지 않으려 애쓴다면, 때로 아프고 힘들지만 충고의 책망을 피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잠언의 성찰 거울에 비추어 보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어리석고 교만한 사람인가요, 지혜로운 사람인가요? 아니면, 이러 저리 유혹에 흔들리는 어수룩한 사람인가요? 이 어수룩한 사람, 왠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요?

 

대림절 8/ 127(주일) - 사59:12, 마3:7-8  '우리의 죄가 매우 많습니다'

법을 아주 잘 지키는 공무원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차가 엄청난 속도로 추월하더니, 시속 180Km로 앞질러 내달리는 게 아닙니까? 그러자 그 사람도 급히 가속 페달을 밟아 같은 속도로 그 차를 따라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법과 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그 사람이 왜 과속하면서까지 앞차를 따라갔을까요? 그 이유는차간 거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답니다.

  우스갯소리지요. 쓸데없는 규정만 들이대면서 정작 필요하고 절실한 문제는 관심조차 없는 무책임한 관료를 빗대는 풍자일까요? 그런데, 좀 고지식하고 답답해 보이기는 하지만, 규정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 사람 참, 예뻐 보이지 않습니까? 요즘 누가 차간 거리를 지키려고 애씁니까? 운전을 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규정과 표지는 지키라고 있는 게 아니라, 피하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법과 규정을 어기면서도 거기에 걸리지 않는 것, 그것을 우리는 지혜와 능력으로 학습하고 있지 않은가요? 그런데 큰 위법은 감지하지 못하고 작은 반칙만을 걸러내는 게 속도계요, 우리 법의 현실이 아닌가요? 불법과 부정, 거짓과 속임수가 일상화되고, 큰 불법과 거짓이 능률과 실질로 숭상되는 사회라면, 거기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죄가 매우 많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의 죄의 고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짓을 품고, 거짓을 말하고, 거짓으로 살아온 그들의 죄를 고백해야 했습니다. 거짓과 속임수가 판을 치니 공평과 정의가 멀어지고, 성실과 정직이 사라지고, 선한 사람이 약탈당하는 악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먼저 백성들의 죄를 고백하게 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는 거짓을 심판하고 진실을 세우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자가 약탈당하고 악한 자가 횡포 부리는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품은 채, 진실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정을 덮은 채, 정의로울 수 있는 사회는 없습니다. 불법을 용인한 채, 공법을 세울 수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하물며 어떻게 거짓과 부정과 불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려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모든 거짓과 불의와 불법으로부터 떠나서, 진실과 공의와 성실로 돌아가는 죄의 고백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회개 없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림절이 깊어갑니다. 이 절기에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우리도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림절 9/ 128(월) - 잠30:8, 딤전6:6  '허위와 거짓을 멀리하게 하소서'

십 년 만에 수도원을 나온 안토니오가 구두 수선공을 만나 얘기를 나누었습니다.“식구는 몇이나 되지요?”“아내와 아이들까지 열 명입니다.”“구두 수선하는 일로 그 식구를 다 먹여 살릴 수 있나요?”구두 수선공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담담하게 말했습니다.“저는 구두를 고치면서 다만어떻게 해야 손님이 이 구두를 편히 신을 수 있을까그것만 생각했습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지요.”그 말을 듣고 안토니오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다시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만 손님의 발이 편안하기를 바라며 일하는 수선공, 어쩌면 그야말로 진짜 수도사가 아닐까요?

허위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잠언의 아굴이라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가 아닙니까? 이 기도 앞에 우리의 기도를 세우면 어떨까요? 이 기도 앞에서 우리는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요?

  그런데 아굴은 알고 있습니다. 허위와 거짓을 멀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어려운 일인지를! 그는 이 두 가지를 자신이 죽기 전에 이루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허위와 거짓을 피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죽기까지 이루어야 할 필생의 과제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허위에 흔들리기 쉽고 거짓에 현혹당하기 쉬운 인간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아굴이 자신을 부유하게도 가난하게도 하지 마시라고 기도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부유할 때 교만하고, 가난할 때는 비굴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만 필요한 양식만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가난해서 도둑질하여 주님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하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라 하셨지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버거운 가난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절박한 기도일까요? 또한 이 기도는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고 자연의 생명을 파괴하는 탐욕과 포만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시기 바라는 기도입니다.

  아굴의 기도는 수도원 안에서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현실 한복판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허위와 거짓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려고 치열하게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죽기 전에 이루어야 할, 죽기까지 멈추지 말고 드려야 할 필생의 기도입니다.

  이 아굴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자족할 줄 아는 경건에 이르렀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대림절 10/ 129(화) - 왕상19:18, 히12:12-13  '절망 가운데 주시는 약속'

<성서조선> 19423월호에 김교신 선생의조와’(弔蛙)라는 글이 있습니다. 선생은 작은 폭포가 있는 바위를 기도처로 삼아 지냈습니다. 거기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마다 물웅덩이에서 개구리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겨울이 되고 얼음이 얼면서 개구리가 보이지 않더니, 혹독한 추위에 마침내 웅덩이 바닥까지 얼어버렸습니다. 개구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봄이 되어 얼음이 녹은 웅덩이를 들여다보니, 개구리 몇 마리가 죽어서 떠올랐습니다. 그놈들은 묻어주고 다시 웅덩이를 들여다보는데, 그 바닥에 개구리들이 기어 다니는 게 아닙니까? 그 모습을 보고 선생은 탄성을 질렀습니다.“! 전멸은 면했나 보다!”

  일제는 이 글을 문제 삼아 <성서조선>을 폐간시켰습니다. 혹독한 겨울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개구리 얘기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일제는 생명과 역사의 희망까지 전멸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엘리야의 탄식입니다. 엘리야는 너무도 매섭고 혹독한 겨울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예언지입니다. 그의 시대는 바알과 아세라가 지배하는 시대였습니다. 바알은 소유의 신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시대, 맘몬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아세라는 쾌락의 신입니다. 탐욕과 쾌락이 모든 것이 되는 시대입니다. 이 혹독한 시대에 엘리야는 메마른 광야로 쫓겨 다니고, 이방인 과부에게 의탁해 겨우 연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시대가 엘리야에게 가혹한 것은 그가 혼자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홀로 맞서는 추위는 얼마나 뼛속까지 시리게 합니까?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사제 팔백 오십 명과 대결할 때도 엘리야는 혼자였습니다. 이세벨을 피해 도망칠 때도 혼자였습니다. 혼자라고 느낄 때, 나 혼자 세상 흐름을 거슬러 오른다고 느낄 때, 얼마나 힘겹고 절망스럽겠습니까?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엘리야는 거듭 토로했습니다. 나는 혼자라고요!

 “나는 칠천 명을 남겨 놓겠다엘이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이 말씀은 혼자 남았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세상이 다 돌아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온통 바알이 지배하고, 삶은 온통 탐욕과 쾌락의 난장이고, 역사는 끝없는 겨울 공화국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바알에 무릎 꿇지 않은 사람, 입 맞추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칠 천명은 바알을 거부하고 세상을 거슬러 오르는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나른한 손과 다리에 다시 힘을 주고 일어나서 똑바로 걷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입니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 내면, 마침내 새 생명이 온 누리에 태동하는 봄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아멘!

 

대림절 11/ 1210(수) - 잠26:12, 고전1:10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리스 신화의 에리스 신은 불화를 일으키는 신입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반목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왕들의 혼인 잔치가 열렸을 때였습니다. 경사스런 잔치에 불화가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 초대받지 않은 잔치에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그가 기어이 불화를 일으키고 마는 그 비법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그는 그저 잔칫상에 사과 한 개를 던져 놓았습니다. 그 사과에는가장 아름다운 신에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지요. 과연 누가 이 사과를 차지해야 할까요? 과연 누가 가장 아름다운 신이라는 말입니까? 제우스의 아내 헤라와 지혜의 여신 아테네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신들의 불화는 후에 참담한 트로이 전쟁으로 발화하고 맙니다. 에리스의 사과, 그것은 기필코 불화를 일으키고 마는 신통한 마력을 지닌 것일까요? 아니지요. 불화의 진짜 원인은 그깟 사과가 아니라 최고가 되고 싶은 허망한 욕심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바울의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처음부터 일치를 호소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심각한 분열상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 고린도 교회는 내로라하는 지도자를 따라 파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불화의 신 에리스가 고린도 교회에 던진 사과는가장 특출한 사도에게라고 새겨 있었습니다. 과연 누가 가장 능력 있는 지도자입니까? 누가 가장 지혜로운 사도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지혜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했습니다. 능력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였습니다. 자신을 내세우는 자들에 맞서 다만 그리스도를 내세웠습니다. 바울은 힘주어 강조합니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토대는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가장 높고 가장 명예롭고 가장 화려한 곳에 군림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장 낮고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초라한 자리에 계신 그리스도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열을 극복하는 한 가지 길이 있다면,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그리스도의 자리로 내려가는 데 있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전한다면서 자기 이름을 선전하는 자 누구입니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면서 세성의 권력과 명예를 도모하는 자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는 특출한 사도는 또 누구입니까? 오늘도 여전히 어리석은 사람에게 더 희망이 있는 게 아닐까요?

 

대림절 12/ 1211(목) - 렘5:1, 롬7:23-24 '자신을 지키는 싸움'

어떤 사람이 옛 소돔과 고모라처럼 죄와 악으로 가득한 도시에 들어갔습니다. 거짓과 탐욕으로 들뜬 사람들, 도둑질과 사기와 폭행이 끊이지 않는 사회, 환락과 패악으로 파멸해 가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는 이 도시를 향해 가슴을 찢으며 외쳤습니다. 이 지독한 죄악을 버려야 한다고, 이제라도 돌이켜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매일 매일 거리를 헤매며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듣지도 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외쳐대는 이 사람을 보고 한 어린아이가 물었습니다.“불쌍한 이방인이여, 당신이 아무리 외쳐도 이 도시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정녕 모르시나요?”그 사람이 아이에게 대답했습니다.“얘야, 나도 처음에는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단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지. 그러나 내가 계속해서 더 크게 말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내가 세상에 물드는 걸 막을 수 없을 것이란다.”

  아마도, 이 도시의 이방인을 우리는 예언자 또는 설교자라 부를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을 신앙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 세상은 요지부동이라는 걸 뻔히 보면서도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것이 예언자의 팔자라면 얼마나 처량합니까? 그러나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계속 외쳐야 한다면 얼마나 처연합니까?

  예레미야는 바로 그런 예언자였습니다. 바르고 진실하게사는사람은 고사하고, 바르고 진실하게살려는사람 하나 찾기 어려운 도시에서, 눈물을 흘리며 온몸으로 부르짖어야 했습니다. 그의 말은 오해와 비난의 비수로 돌아와 그의 심장을 찢었지만, 그는 자신의 소명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피를 토하는 절규로 자기 자신을 지켜내야 했습니다.

  어찌 예레미야뿐이겠습니까? 소위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렀어도, 하늘 뜻을 깨닫기는커녕, 나 자신 하난 지켜내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지, 우리의 도시에서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겨우 깨달아 가는, 나는 얼마나 모자라는 인간입니까? 자기 자신을 지켜내려 애쓰는 사람 하나 찾기 어려운 우리의 도시는 또 얼마나 혼탁합니까? 어쩌면 이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치열하게 지켜내려는 싸움에서 시작되고, 거기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의 도시에서 자신을 지켜내려고 치열하게 기도하는 사람, 어쩌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닐까요? 지금 우리는 목숨 걸고 무엇을 지키고 있나요?

 

 

대림절 13/ 1212(금) - 사42:7, 마18:6 '다른 사람을 지키려고'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은 그야말로 아름답고 향기롭고 찬란한 곳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황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거기 사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곳에는 한쪽 손이 없는 사람, 한쪽 발이 없는 사람, 한쪽 눈이나 구기 없는 사람, 무두가 하나같이 장애인들뿐이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죄짓지 않으려고 손발을 잘라 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죄짓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음에 품은 죄까지 따진다면, 온몸이 성할 자 누구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죄짓지 않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지 않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짓고도 자신의 죄를 잘 모릅니다. 나 자신의 허물을 보는 것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죄짓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큰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마소가 끌거나,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야 움직일 수 있는 연자 맷돌 말입니다. 자기 죄는 손과 발을 자르는 것으로 끝나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은 아예 온몸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게 아주 작은 사람 하나, 별 볼일 없는 사람 하나일지라도 말입니다. 죄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남을 죄짓게 하지 않는 것, 남을 지키는 것은 더욱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유혹 많은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어쩌면 날마다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빼는 결단, 절단의 연속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고난의 낙인 없이 자신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없이 어떻게 구원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자 하나라도 잘 지키려면, 날마다 스스로 맷돌을 목에 걸어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윗사람, 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부모라 일컫는 자들은 더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열배 백배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나 때문에 그 누군가 시험에 들지는 않았을까요? 나 때문에 지금 그 누군가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을까요?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가까이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대림절 14/ 1213(토) - 삼상15:17, 막10:44 '우리의 보물 항아리에는'

옛날 어느 임금님이 시골 목동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정직하고 스스럼이 없고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착한 성품인데다 평온한 목동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첨에 능하고 눈치 빠르며 파당 짓기에 바쁜 신하들과는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하여 그를 임금을 보필하며 관리들을 감독, 지휘하는 재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신하들이 그를 시기하였습니다.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하지요. 드디어 신하들은 그의 약점을 잡았습니다. 보물 항아리! 그렇습니다. 그는 광 깊숙이 항아리를 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고변을 받은 임금은 신하들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가서 그 항아리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괴이한 일입니까? 항아리 속에는 낡아빠진 옷 한 벌과 지팡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임금이 그게 무엇이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습니다.“임금님, 이것은 제가 목동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간직한 것입니다.”

  자기를 망각하지 않으려던 그 목동, 자신을 기억하게 해주는 그 목동의 항아리야말로 진짜 보물 항아리 아닐까요? 사람은 자주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립니다. 건망증이 심하거나 치매에 걸려서가 아닙니다. 힘이 커질수록, 명예가 드높아질수록, 그 이름을 온 세상이 다 알게 유명해질수록 정작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을 망각했고, 그래서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왜, 언제 자신을 잊었습니까? 승리했을 때였습니다. 사울은 아말렉에 승리를 거둔 직후 버림받았지요. 그런데 아말렉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가장 숙명적인 원수 중의 원수입니다. 출애굽의 길을 방해하고 이스라엘을 괴롭힌 그야말로 철천지원수입니다. 사울은 바로 이 아말렉에 대승을 거두었을 때 자신의 본분을 잊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막내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거기에서도 작은 문중의 약한 집안 소속이었습니다. 사울 자신도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스스로를하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알았을 때에는 겸손했던 그가 아말렉을 이기고 나서는 달라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능력(군대)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마저도 자기 뜻대로 수정해 버립니다. 전리품을 모두 멸절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제 맘대로 빼돌렸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는 명분으로 말입니다. 이제 모든 결정을 하나님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합니다. 그는 자기가 예언자보다, 하나님보다 크다고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자기 이름을 높이려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창고에도 우리를 잊지 않게 해주는 항아리 하나쯤 보물로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대림절 15/ 1214(주일) - 잠21:13, 마25:40 '잊지 말아야 할 사람'

조안이 간호대학 시절 시험을 치를 때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했기에 모르는 문제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문제에서 걸렸습니다.“학과 강의실을 청소하는 아줌마의 이름은?”얼마나 당혹스런 질문입니까? 평소에 자주 마주쳐서 낯익고, 가벼운 인사도 나누지만, 어떻게 그 이름까지 안단 말입니까? 결국 마지막 문제를 놓쳤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이 문제도 채점하느냐고 물었더니, 교수님이 대답했습니다.“물론, 이 문제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간호사는 사람을 돕는 직업인데, 사람에 대해 관심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돕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마음을 두고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이 문제를 틀리고서야 배운 간호학의 기본을 그는 평생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청소하는 아줌마의 이름과 함께.

  마태복음은 말씀의 복음서요, 가르침의 책이라 할 만하지요. 그런데 이 모든 말씀, 가르침을 꿰뚫고 흐르는 그 핵심을 찾으려면 어디를 잃어야 할까요? 아마 무엇보다 마태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가르침으로 자리매긴최후의 심판 비유가 아닐까요?

  마지막 심판 비유에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오른 쪽은 양과 같은 사람들이고, 왼쪽은 염소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판정이 떨어집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이라는 준엄한 판정입니다. 그런데 양과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영원한 생명의 상을 받게 되었을까요? 염소와 같은 사람들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런 끔찍한 벌을 받게 되었을까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로 갈라지는 그 지점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비유는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를 지목합니다.‘여기입니다.‘저기’‘그곳이 아닙니다.‘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입니다. 가장 낮고, 가장 작고, 가장 약한 사람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는 예수님 모든 말씀의 결론입니다. 그 모든 가르침을 꿰뚫고 흐르는 본류입니다. 그 모든 말씀의 진주를 하나로 꿰는 줄입니다. 무엇보다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교회 공동체의 중심입니다. 마태복음은 곧 교회의 복음서가 아닙니까? 세상에서는 가장 큰 사람에게 복종하지만, 교회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 하나를 받들어 섬깁니다. 여기 있는 가장 작은 사람 하나는 시혜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받들어 섬겨야 할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 시험에서 어떤 문제를 내실지, 조금은 짐작이 가지 않나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람, 그가 누구지요?

 

대림절 16/ 1215(월) - 시90:4, 딤후4:13 '무엇을 남길까요'

원주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양안치 고개 초입에 있는토지 문학관을 다녀온 분의 생각이 담긴 글입니다. 그곳은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을 기념하는 곳이지요. 본관 1층 한 쪽에는 선생의 유품을 진열한 방이 있습니다. <토지>하면 얼마나 대단한 작품입니까? 박경리 선생은 또 우리나라 문단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입니까? 그가 남긴 유품이라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남긴 유품들은 기대와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친필 원고 몇 묶음, 낡은 펜 두어 개, 밀짚모자에 다 닳아빠진 호미 한 자루, 옷가지와 반짇고리, 단지, 안경, 뭐 그런 것들이 다였습니다. 너무 싱겁지 않습니까? 실망, 또 실망! 그런데 돌아오는 길 내내 선생의 그 소소한 유품들이 자꾸 눈에 밟혔습니다. 그렇게도 소박한 물건들만 가지고도 그토록 큰 작품을 써낸 선생의 모습이 얼핏 보일 듯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가 남긴 물건이 그를 빛나게 하는 게 아니라 그의 삶이 그 잔잔한 유품들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바울하면 성경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입니까? 그런데 만약 우리가 사도 바울을 기리는 기념관을 짓는다면, 거기에 무엇을 전시할 수 있을까요? 그가 남긴 어떤 물건으로 그의 손길을 느끼고 그의 삶을 기릴 수 있을까요? 바울의 기록에 보면, 그가 특별히 아꼈던 어떤 물건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평생 한곳에 머물지 않고 떠돌며 살았으니 무엇을 남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물건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는 바울의 인생 막바지에 쓴 것이지요.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죽음을 예감하며부어 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비장합니까? 이 비감한 때에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부르면서 꼭 가져오라고 하는 물건이 있다면,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요? 그 물건은 무엇입니까? 외투 한 벌과 책 몇 권! 그것뿐입니다. 너무 작지 않습니까?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생을 마치면서 겨우 옷 한 벌과 책 몇 권밖에 남길 것이 없다면 그 인생은 너무 남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바울이 있습니다. 옷 한 벌에 책 몇 권밖에 남길 것이 없으면서도, 아니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남겨 준 바울이 있습니다.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린 바울 말입니다.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다만 한 가지를 얻기 위해 버렸다고 했지요(3:8). 그 보물이 무엇이지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남길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 무엇을 남기려고 하지요?

 

대림절 17/ 1216(화) - 전5:13, 약1:14-15 '파멸의 시작은'

은나라의 주왕이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어 가졌습니다. 그러자 기자는 그 상아 젓가락에서 주왕의 파멸을 보았습니다. 기자는 말했습니다.“상아 젓가락은 아무래도 흙으로 만든 그릇과는 어울리지 않으니 반드시 뿔이나 옥으로 만든 잔과 그릇을 쓰게 될 것입니다. 또 옥으로 만든 잔이나 그릇은 푸성귀 소찬과 어울리지 않으니, 반드시 소고기나 코끼리 고기나 표범 내장 요리를 먹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음식은 소박하고 단출한 옷을 입고 초가지붕 아래서 먹을 수 없으니, 반드시 비단옷에 아홉 겹 넓은 집과 화려한 누각 아래서 먹게 될 것입니다.”

  결국 산해진미와 화려한 생활은 주왕에게 파멸을 가져다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주왕은 기자의 예고대로 호화스런 누각을 짓고 주색에 빠졌습니다. 수많은 여인들을 숲처럼 두르고, 술찌끼로 언덕을 만든 다음 술로 못을 채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기름 바른 구리기둥을 세우고 그 밑에는 숯불을 피워 죄수들로 하여금 그 기둥을 오르다가 떨어져 죽게 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기자의 예언 5년 만에 주왕은 파멸했고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어찌 주왕뿐이겠습니까? 한 인간의 파멸, 더 나아가 한 민족의 파멸도 그 시작을 보면 아주 작은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란 대개 자기 자신이며, 더 깊게는 욕심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은탐스러움에서 시작했으며,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의 파멸도탐심에서 비롯했습니다.

  그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헤렘(멸절) 명령을 어겼지요. 헤렘 명령은 적을 철저히 진멸하라는 명령인데, 그 철저함과 가혹함의 속내는 적을 겨냥하기보다 사실은 이스라엘 자신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는 그 탐욕이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고 변명합니다. 마치 그 유혹의 시작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듯이!

  야고보는 경계합니다.‘하나님이 나를 유혹한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에 빠지고 함정에 빠지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모든 파멸은 작은 욕심에서 싹이 트고 자랍니다. 욕심은 죄의 씨앗입니다. 죄는 죽음의 나무지요. 죄가 자라면 죽음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퍼뜩 깨어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에서 죄가 싹트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작은 욕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에 철저하고 가혹해야 합니다. 파멸은 오늘도 우리가 만든상아 젓가락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손에 들고 있는 젓가락, 이건 무엇으로 만든 건가요?

 

 

대림절 18/ 1217(수) - 사62:10, 막6:5-6 '자기 것을 내어 놓아야'

어느 아버지가 아들 셋에게 양 열한 마리를 유산으로 남기면서, 맏이에게 1/2, 둘째에게 1/4, 막내에게는 1/6을 주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남감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열한 마리의 양을 반으로 나눈다는 말입니까?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본 랍비가 자기 양 한 마리를 유산에 넣은 다음, 유언대로 나누었습니다. 맏이에게 여섯 마리, 둘째에게 세 마리, 그리고 막내에게 두 마리, 그렇게 나누고 나니 한 마리가 남았습니다.

  랍비 자신의 양! 이것이 랍비의 지혜입니다. 문제가 어려울수록 그 생각을 바꿔 보라는 얘기입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에만 집착하며 끙끙대지 말고, 보다 크게, 보다 넓게 둘러보면 길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정말 난감한 과제는 자기 것을 내어 놓고서야 풀린다는 얘기지요. 어려울수록 참견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함께 뛰어들어 헤쳐 나갈 친구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병을 고치고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그 기적을 행하는 이의 신적인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고, 사람들은 믿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의 믿음의 참여 없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함께 더불어 이루는 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경꾼으로 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빈 들에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을 때, 그 놀라운 기적은 한 아이가 내어놓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병자를 고쳐 주실 때, 그 병지를 데려온 사람들의 손길이 있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당하는 병자에게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이방 여인의 믿음을 통해서 생명의 기적을 행하시기도 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을 내어놓았을 때, 초라한 믿음이지만, 그 믿음을 통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 믿음을 내어놓지 않는 곳에서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도 그랬고, 예루살렘에서도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것을 내어놓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우리를 넋 빠진 구경꾼으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 삶의 주인으로 세우십니다. 우리를 구원과 생명의 역사에 참여자로 부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으로 주님의 기적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믿음! 바로 그것이네요.

 

대림절 19/ 1218(목) - 삼상17:45, 행3:6 '물맷돌 다섯 개'

골리앗에 맞서 싸우려면, 어떻게 무장해야 할까요? 블레셋은 전쟁에 능한 족속이었습니다. 해양 민족, 그들은 바다를 누비며 해적질을 일삼던 자들이 아닙니까?‘를 다루는 기술까지 가졌으니 무기도 강력했습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천하무적의 장수가 있었습니다. 골리앗이 바로 그입니다. 그 키가 여섯 규빗(3m)하고도 한 뼘이나 더 되는 장대한 기골만으로도 기가 질릴 판인데, 그의 무장 또한 완벽했습니다. 그의 갑옷은 무게가 오천 세겔이었으니, 60Kg에 이릅니다.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비늘 갑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다리에는 각반을 차고, 베틀 용두머리만큼이나 굵은 창대에 창날만도 10Kg에 이르는 거대한 창을 휘두르며, 방패를 든 호위병을 앞세우고 출정하는 골리앗. 그를 누가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무지막지한 창날을 막으려면 얼마나 튼튼한 방패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 탄탄한 갑옷을 뚫으려면 얼마나 예리한 칼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골리앗에 감히 맞서려고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병사들 앞에서 재롱이나 떨어야 제격인 홍안의 소년이 골리앗에게 도전한 것입니다. 사울은 그를 가상히 여겨 이스라엘 최고의 무기로 무장시켰습니다. 그에게 왕의 투구를 씌우고 갑옷을 입히고 칼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의 무장을 벗었습니다. 무장해제! 그 무장을 하고는 걸음조차 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양떼를 칠 때 사용하던 지팡이를 들고, 시냇가에서 돌멩이 다섯 개를 골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지팡이 하나, 돌멩이 다섯 개! 이것이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무장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진정한 무기는 다른데 있습니다.“너는 칼과 창을 들고 나왔으나 나는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왔다.” 다윗의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골리앗은 그의 무력을 의지하고 있으나, 다윗은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무장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저 골리앗의 무장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막대기와 돌멩이를 의지한 게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폭력에 맞서 다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갔습니다. 이로써 다윗은 자신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에 참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싸움의 본질은 하나님의 싸움이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돌멩이가 하나님의 싸움에 도구가 된 것입니다. 다윗의 승리 또한 창검 기술을 능가하는 돌팔매 기술의 개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 무장하고 있나요? 누구와 싸우고 있지요?

 

 

대림절 20/ 1219(금) - 신30:14, 마7:21 '날지 못하는 날개'

도도새라는 새가 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 이 새는 인도양에 있는 모리셔스 섬에 살았습니다. 몸무게가 25Kg에 이르는 큰 새인데, 1681년에 멸종되었습니다. 본래 도도새는 모리셔스 섬에서 아주 번성했습니다. 섬 안에 천적이 없는데다가 먹이 경재 상대도 없으니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안전한 환경 때문에 도도새는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날아야 할 필요가 없어서 날지 않으니 차츰 날개가 퇴화되었습니다. 몸은 더욱 무거워지고, 도망칠 일도 없으니 느리느릿 굼떴습니다.

  그런데 15세기경 포르투갈 배가 표류하여 섬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굶주린 선원들에게 무엇이 필요했겠습니까? 멍청한 이 새가 선원들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메추라기나 매한가지였습니다.‘도도라는 말은 포르투갈어로바로’‘멍청이라는 뜻입니다. 이후 사람과 함께 동물들까지 섬에 들어오면서 도도새는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날개가 있지만 도무지 날 줄도, 도망칠 줄도 모르는 새, 그래서 결국 멸종되고 만 새, 도도새입니다.‘도도, 참 멍청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날개가 있으면서도 날 줄 모르는 멍청한 것이 어디 도도새뿐일까요?

  산상수훈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실천입니다.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오히려 너무 많이 아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비판하실 때,‘말은 하지만 행하지는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어디서 이루어질까요? 율법은 아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데서 완성됩니다. 말씀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까지 실천하는 데서 완성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식이 아니라 실천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결론 부분도 거듭거듭 실천을 강조하지요.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사람은 그 실천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주님, 주님하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갑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습니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그리스도인에게 말씀이 날개와 같다면, 실천은 날갯짓과 같습니다. 실천하지 않는 말씀은 도무지 날갯짓하지 않는 날개와 같습니다. 퇴화하여 아무 쓸모없는 도도새의 날개처럼 말입니다. 날갯짓은 불편한 일입니다. 지루하고, 힘겹고, 고통스러워 몸을 축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다면 어느새 우리 몸이 가벼워져서 저 푸른 하늘을 자유로이 훨훨 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날개가 그저 불편한 짐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림절 21/ 1220(토) - 신6:5, 눅10:27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마리안네 스퇴거, 마가레트 피사렉, 건망증이 심하더라도 꼭 기억하고 싶은 두 분의 이름입니다. 이분들은 머나먼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40여 년 전(1962, 1966)에 백의의 천사로 소록도를 찾아들었던 수녀님들입니다. 이분들은 장갑을 벗어버리고, 맨손으로 환자들의 뭉그러진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일과 후에는 죽을 쑤고 과자를 구워서 마을을 돌며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후원금은 물론 봉사자 식비로 받은 작은 돈도 자신들을 위해서는 한 푼 쓰지도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회갑 잔치라도 마련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뜻도 기도처로 들어가 극구 사양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오롯이 바치고, 고희에 이르러 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구가 다른 이들에게 부담이 될까 걱정하여,‘친구 은인들에게 짧은 편지 한 장 남기고, 이른 새벽을 타 소리 없이 떠났습니다. 떠나는 그분들 손에는 섬에 들어올 때 들고 왔던, 이제는 다 낡아버린 가방 하나만 들려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분들은 꽃띠 젊은 나이에 낯선 땅, 이 나라 사람들조차 피하는 섬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 상처를 맨손으로 어루만질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기들의 수고에 주어지는 최소한의 보수마저도 다 나눌 수 있었을까요?

  물질은 그렇다 치고, 어떻게 그 고귀한 헌신에 주어지는 최소한의 명예, 그 작은 칭송조차도 일절 거절할 수 있었을까요? 40년 평생을 다 바쳤으면 이제 노후는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누려도 좋을 텐데, 어떻게 그것조차 부담이라며 훌훌 떠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토록 모든 것을 다하여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그분들의 마음은 다만 하나님만을 향해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기에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아니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 있기에 세상으로부터 오는 어떤 명예도 사양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습니다. 들에 핀 작은 풀꽃 하나에서,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까지, 모두 사랑스럽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혹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그리하여 행복하라!

 

 

대림절 22/ 1221(주일) - 시133:1, 요일4:21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기러기가 먼 거리를 이동할 때,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것일까요? 그렇게 한 무리를 지음으로써 독수리나 매의 공격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뿐만 아니라 대열을 이루면 혼자 나는 것보다 무려 70% 이상 더 갈 수 있습니다. 앞에 나는 기러기의 날갯짓이 만들어 내는 상승기류를 뒤따르는 기러기가 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열에서 가장 힘이 드는 앞자리는 가장 힘 있는 기러기들이 교대로 맡습니다. 누구든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맨 뒤에 나는 기러기들은 끊임없이 소리를 내고, 앞에 나는 기러기는 그 소리를 들으며 속도를 조절합니다. 도중에 병들거나 총에 맞은 기러기가 생기면 두 마리가 같이 내려와 보살피다가, 죽은 다음에야 그다음 대열로 합류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기러기를 외롭고 고독한 새라 부를 것이 아니라, 참으로 공동체적인 새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요? 함께 더불어 나는 비행의 탁월한 효율성뿐만 아니라, 그 아름답고 따뜻한 생명의 신비를 우리가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편 133편은 짧지만 참으로 아름답고 따뜻한 시입니다. 시인은 비할 바 없는 아름다움과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 아름다움은 마치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을 타고 내려 옷깃에 따라 흐르는 향긋한 기름과 같습니다. 이 기름은 향유, 향기로운 기름입니다.

  무엇보다 이 기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에게 부어지는 기름입니다. 귀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소명을 나타내는 기름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사제라 할 수 있는 아론에게 부어진 기름, 하나님의 사람에게 부어진 기름!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지 않습니까?

  또한 그 아름다움은, 저 혜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으로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시온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산입니다. 그 하나님의 산에 푸른 움이 돋고, 온갖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피며, 싱그럽고 달콤한 과실이 영글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생명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슬입니다. 생명을 일으키고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물, 생명의 근원,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시인이 이토록 아름답다고, 더없이 즐거운 모습이라고 비유했던 그것은 무엇입니까? 아론의 기름처럼, 메시아의 기름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것, 헤르몬의 이슬, 생명의 물처럼 즐겁고 가슴 벅찬 그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이요, 모든 기쁨의 기쁜인 그것은 무엇입니까?

  시인은 노래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즐거운 것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이라고! 함께 더불어 사랑하는 삶이라고! 하나님께서 그곳에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음 곧 영생이라고! 아 그렇군요. 영생, 그것은 혼자서 다 차지하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온 생명이 함께 더불어 누리는 것이군요.

 

대림절 23/ 1222(월) - 출33:19, 막1:41 '불쌍히 여기는 마음'

노련한 포수가 사슴을 보고, 활을 당겨 단발에 맞추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또 다른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울부짖더니 쓰러져 죽었습니다. 한 마리는 분명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다른 사슴은 아무런 상처도 없는 게 아닙니까? 하도 이상하여 그 배를 갈라보았더니 그 창자가 비틀려 아홉 토막으로 끊어져 있었습니다. 어미였던 것입니다. 단장의 비통! 그게 새끼의 고통을 보는 어미의 고통이랍니다. 어미의 사랑, 그 아픈 사랑의 마음자리는 창자에 닿아 있는 것일까요?

 “나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가장 알맞은 말이 무엇일까요? 긍휼! 자비 또는 사랑이라고도 옮기는 이긍휼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요? 하나님의 마음은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긍휼이라는 히브리 말라훔자궁(레헴)’과 통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의 마음, 그 긍휼한 마음의 자리는 자궁, 모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자리가 생명의 모태인 자궁이라는 말은 또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창조주요,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아버지이시며, 모든 생명의어머니가 아니십니까?

  자기 옷을 찢어 썩은 살을 드러내야 하고, 머리를 풀어헤쳐 눈에 띄게 해야 하는 나병 환자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부정하다고 말합니다. 나병 환자 자신도부정하다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고, 사람들은 그를 만질 수도 없고 만져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만지시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무엇일까요? 그에게 다가서게 만든 것은 어떤 마음일까요? 그를 만지게 한 그 마음은 또 무얼까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렇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기불쌍히 여기는마음은 심장, 내장, 자궁과 같은 장기를 뜻하는 그리스어스프랑크논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그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자리 또한 자궁이라는 말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식의 마음이 부모의 마음을 닮듯,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그가 행한 많은 일들도, 십자가의 길도,‘불쌍히 여기는마음에서 비롯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예수님의 마음도, 긍휼한 마음입니다. 긍휼한 마음은 저 깊고 깊은 생명의 근원에 공명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자리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도 저 깊고 깊은 생명의 모태에 공명하고 있나요?

 

대림절 24/ 1223(화) - 사8:18, 눅2:12 '우리에게 주신 징표'

예전에 오랫동안 편지로만 사귀던 처녀 총각이 있었습니다. 비록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마음도 통하고 정도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서로 그리움이 절절해지자 드디어 만나기로 약속했지요. 장소는 서울역 광장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각자 알아볼 수 있는 표를 정했습니다. 남자는 하얀 손수건을 윗주머니에 꽂고 여자는 빨간 머플러를 머리에 쓰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되었지요. 밤차로 꼬박 달려와 서울역에 도착한 총각은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하얀 손수건을 정성스레 윗주머니에 꽂은 다음 광장으로 나섰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광장에는 온통 빨간 머플러 처녀와 하얀 손수건 총각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게 그해의 유행이었답니다.

  성탄이 가까이 왔습니다. 온통 축하 분위기입니다. 그렇지만 올 성탄절에 우리가 정작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성탄은 그저 번잡한 공휴일의 하나가 되고 말겠지요. 예수님 없는 성탄은 붕어없는 붕어빵보다 더 허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표가 있을까요?

다행히도 성경은 아기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표를 하나 가르쳐 줍니다. 저 첫 번 성탄절에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표 말입니다. 그 표징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그 아기가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왕과 포대기? 어울리지 않습니다. 영광의 임금과 냄새나는 구유? 더더욱 말도 안 됩니다. 적어도 왕을 표시하는 옷이라면 황금 용포쯤은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이 앉을 자리라면 옥좌가 당연하지요. 낡은 포대기와 구유가 어찌 왕의 표란 말입니까? 그건 노숙자의 표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이 말도 안되고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는 징표, 그것이 성탄의 표였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표였습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표, 화려한 표, 멋진 표만을 찾던 저 세상 왕들과 경건을 자랑하던 종교인들은포대기와 구유의 표를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니지요. 알아보지 못한 게 아니라, 아예 그런 불온한 표를 잔혹하게 지워 버리려고 야합했습니다.

  세상의 중심(로마)에서 자줏빛 용포를 두르고 황금 옥좌에 앉은 아우구스투스가 스스로 신으로 등극하여 이미 신의 표징을 장악한 마당에, 그 세상의 가장 후미진 변두리에서포대기와 구유가 참 신의 표징이라고 외치는 천사의 노래를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들었을까요? 이 반역의 징표를 누가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아니지요. 그때만의 문제는 아니지요. 지금 우리는 무슨 표를 찾고 있지요?

 

 

대림절 25/ 1224(수) - 사53:3, 눅2:7 '내 방으로 오세요'

어떤 시골 교회에서 성탄절 전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어느 교회나 성탄절 전야에는 성탄 연극이 필수였습니다. 주로 아이들이 성탄 전날 밤에 무대에 올리는 성탄 극인데, 그 내용은 언제 어디서나 그 나물에 그 밥이었지요. 마리아와 요셉, 동방 박사들과 목자들이 담요를 두르고 지팡이 하나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그 얘기 말입니다. 그 시골 교회에서도 성탄 극을 준비했는데, 아이들이 적으니 모두가 배역을 맡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중에는 조금 느린, 소위 말하는착한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아이에게 무슨 역을 맡겨야 할까요? 친절하고 현명한 선생님은 아이에게 알맞은, 가장 대사가 짧은 역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여관 주인 역입니다. 여관으로 찾아온 마리아와 요셉에게방 없어요하고 한마디 던지면 되는 것입니다. 됐습니다. 이제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아이들과 선생님은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무대도 꾸미고 담요와 커튼까지 동원해서 분장도 했지요. 그렇게 해서 드디어 극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아이들은 연습한 대로, 또 무대 아래 구석에서 선생님이 지휘하는 대로 연극을 제법 잘 소화해 갔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리아와 요셉이 지친 몸으로 여관을 찾아오는 그 문제의 장면에 이르렀습니다. 옷 속에서 흘러 내리는 바가지를 추스르느라 쩔쩔매는 마리아를 부축하며 요셉이 여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여기 방이 있어요?”

  드디어 여관 주인의 차례. 선생님은 아이를 보고 두 손을 휘저으며 없다고 하라는 사인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아이가 사달을 내고 말았습니다.

여기, , 방은 없는데... 그렇지만, 내 방이 있으니까 내 방으로 들어오세요.”

  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마리아를 끌어들이는 게 아닙니까? 그때 그 연극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웃음이 터지고 연극은 수습불가로 흩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순간 모두가 얻어맞은 듯 숙연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성탄 극은 각본과는 완전히 어긋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첫 성탄절 이래 처음으로, 그리고 그 후에도 어쩌면 유일하게, 아기 예수님에게 자기 방을 비워 드린 아이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 성탄 극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가슴 따뜻한 성탄 극이 아닐까요?

  아, 올 성탄절에는 또 누가 있어 아기 예수님께 자기 방을 비워드릴 수 있을까요? 누구? 저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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