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제1일/ 2월10일(수)/ 창18:22-23/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오늘은‘참회의 수요일’(재의 수요일)입니다. 교회는 이날에 전통적으로 이마에 재를 바르고 자신을 준미 앞에서 돌아보며 회개함으로 사순절의 첫날을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문에서 자신에게는 기도할 자격도, 하나님 앞에 설 자격도 없다는 가장 낮은 마음으로 스스로를“티끌이나 재와”같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낮은 마음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여 애타게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누구도 자신의 연약함과 자격 없음, 죄인 돔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바로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는 그런 대로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니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울 앞에 선 나는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작은 자신을 발견하고, 티끌이나 재와 같은 자신의 간구를 부디 들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던 아브라함을 기억합시다.“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니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결국 이 간구는 이웃의 구원을 위한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며, 철저한 회개와 함께 이웃을 향한 애타는 기도를 주님께 드립시다.
▣사순절 제2일/ 2월11일(목)/ 시90:1-17/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인생의 끝에 이른 분들은 한 결 같이 생이 참 짧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인생이란 참 짧고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12절). 우리의 주인 되신 주님 앞에서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인데, 인간은 어리석게도 영원하지 못한 것을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고, 일시적인 해갈을 주는 것들에 대단한 기대를 걸고 살아갑니다. 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가치를 따르며 살아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기웃거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 앞에 설 때에야 비로소 인생의 나약함과 덧없음을 절감하게 되고, 우리 인생의 향방과 세계의 운명이 온전히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천 년의 시간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 삶이 결코 길지 않으므로 오늘 하루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지혜와 안목을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는 하나님의 시간에 속해 있으며,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과 은총, 그리고 소망을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시며 천 년의 영원한 삶을 품으시는 주께 겸손히 구하는 자가 참 지혜자입니다.
▣사순절 제3일/ 2월12일(금)/ 시51:1-19/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인간을 티끌이나 재와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은 죄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참회의 수요일에“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라는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범죄 이후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선고였습니다. 회개는 주님 앞에서 이처럼 우리의 죄인 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오직 주님 한 분께 죄 사함이 달려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자기 인식과 가슴 아픈 참회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악 됨은 어떻게도 벗어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 중에 잉태되었고,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우리의 죄과가 항상 우리의 앞에 있으며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기를 반복합니다. 그러한 우리는 도저히 낯을 들기 어렵지만, 나의 죄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 한 분만이 우리의 죄를 다루실 수 있습니다. 소망의 불을 꺼뜨리지 말고, 간절함과 믿음을 가지고 모든 참회의 고백을 꺼내 드려봅시다. 너무나도 깊숙한 곳에, 너무나도 익숙한 곳에 자리한 나의 죄를 꺼내어 하나님과의 은밀한 만남 속으로 나아가 낱낱이 고백한다면, 오직 한 분 주께 달린 죄 사함의 은총이 나의 삶을 새롭게 빚을 것입니다.
▣사순절 제4일/ 2월13일(토)/ 벧전1:22-25/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진리에 순종하면 영혼이 깨끗해집니다. 순종은 내 마음의 방 안에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버리고 내가 순종하는 진리와 하나님의 성품만을 남겨 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의 자아를 죽이고,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까지는 크고 작은 순종의 연습이 쌓여야 합니다. 말씀을 읽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순종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내 속에 온화한 성품, 아름다운 말씨, 여유 있는 표정,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덧입어 변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늘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 깊숙한 곳을 청소해야 될 때, 뿌리 깊던 내 아집이 말씀과 부딪히게 되러 큰 갈등과 고난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순종하고자 하는 작은 의지만 갖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청소한 자리에 풍성한 것을 채워 주십니다.
그러면 어느새 그 방에는 이웃이 와서 차도 마시고, 담소도 나무며, 서로 위로와 격려를 나누게 됩니다. 이렇듯 깨끗한 방, 곧“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된다면 우리 삶은 복된 삶의 진원지가 될 것입니다.“뜨겁게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된다면, 나를 통해 그 자리에 진리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순절 제5일/ 2월15일(월)/ 마4:17-22/ 나를 따라 오라
예수님 당시 어부는 갈릴리 산업구조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생활은 유복한 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부인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곧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모든 것을 뒤도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본문 20절, 22절의 "따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로쎄오'는 '제자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지식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이 되는 일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같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과거에 속한 것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인 되셔서 나의 삶을 주도하시도록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께서 제자로 부르신 자입니다. 그러나 합리화하며 아직 떠나지 못한 내 자리가 있습니까? 버리지 못하고 숨겨둔 것이 있습니까? 과거의 삶의 자리에서 익숙하게 굳어진 것들을 찾아내어 버리기로 결단합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따라오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도, 주님의 사역에 쓰임 받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순절 제6일/ 2월16일(화)/ 눅9:18-27/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본문에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듯, 베드로의 이 고백에도 메시야에 대한 영광과 권세와 위엄만이 가득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난에 관해 예고하십니다. 그분의 사역에는 영광만이 아닌 고난의 십자가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십니다. 이렇듯 교회의 신앙고백 안에는 영광뿐 아니라 "십자가의 수난의 길을 따르리이다."라는 고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 비로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나의 유익을 좆는 삶을 부인함으로 마땅히 져야 할 나의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른다면, 우리는 반드시 장차 주의 영광과 권세와 위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으며 오늘 내가 부인해야 할 모습은 무엇인지, 져야 할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부인해야 할 모습들과 마땅히 져야 할 임무를 위해 기도합시다.
▣사순절 제7일/ 2월17일(수)/ 눅9:57-62/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때가 다가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사명에 집중하며 한 길만을 걸으시던 예수님은 때가 왔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심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사마리아 사람들의 푸대접에 제자들이 흥분하며 저주하려 할 때에도 주님을 제자들을 꾸짖으며 조용히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십자가 사명을 향한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중심을 잃지 않고자 그리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는 요청 앞에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올 것을 청하는 한 유대인에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전과 사명, 나아가 제자의 비전과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지금 가장 절실한 일은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듣도록 전하며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후에 제자들이 그 일을 모두 감당해야 했기에 손수 모범을 보이시며 가르치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보다 앞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이루는 일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때가 가까운 지금, 생명을 살리는 일에 시급함과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그 나라를 일구어 가는 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8일/ 2월18일(목)/ 렘1:4-10/ 너를 성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구별하여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험하고 불안한 격변의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시대와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살도록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죄악으로 위기에 처했던 당대에 예레미야는 구원보다 심판을 더 많이 선포하고, 심판으로 찾아올 구원을 예비하며,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대항하여 온 세상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오직 받은 명령대로 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물러서고 싶고, 심지어 실패할 것이 명백해 보일지라도 부르시고 맡기시고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시기 위해 예레미야처럼 우리를 구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된 삶은 결코 환영받거나 쉬운 길이 아닙니다. 세상에 주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일은 사람들로부터 배척 받는 길입니다. 그러나 구별하여 불러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따를 때, 분명 우리 이웃과 민족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 제9일/ 2월19일(금)/ 갈1:11-17/ 나를 부르신 이가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유대교적 전통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전통에 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심히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통해 회심하게 되었고, 이방의 사도로서의 소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밝히며 자신의 회심과 받은 소명이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이며 그 부르심이 자신에게 큰 기쁨이었음을 말합니다. 또한 바울이 이렇게 예수님을 전하며 이방에 복음을 나타내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바울 사도는 혈육과 의논하지도 않고 아라비아와 다메섹으로 갔다고 스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선교에 대해 계획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으며, 그리스도와의 만남, 또 자신의 삶과 사역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바울은 평생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화답하며 그분의 주권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나는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지금의 나를 있게 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고백이 은혜를, 그 은혜는 기쁨을 가져올 것입니다. 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 제10일/ 2월20일(토)/ 마3:13-17/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 받기를 청하셨습니다. 세례는 죄 씻음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니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이것을 알았기에 도리어 자기가 에수님께 세례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그분의 신분 확인임과 동시에 사명의 위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순종의 헌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나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루부터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 봅시다.
▣사순절 제11일/ 2월22일(월)/ 요20:19-23/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세상에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땅끝까지 이르러"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행 1:8).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이 주님이 보내신 곳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때 그곳이 곧 보내심의 자리요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보내셨음을 믿고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주님이 맡기신 일입니다. 그 자리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바로 지금 있는 그곳에 나를 두신 것은 주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주님이 보내신 뜻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시오. 주님이 함께하시며 언제나 평강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순절 제12일/ 2월23일(화)/ 사52:7-10/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세상에는 한숨, 절망, 다툼, 시기, 질시, 그리고 흑암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굶주림에 신음하는 소리, 억울한 차별에 눈물짓는 소리, 외로움에 우는 소리, 서러움에 옴서리치는 소리가 귀를 막아도 들려옵니다.
사람들은 좋은 소식에 목말라 있습니다. 세상은 좋은 소식을 찾고 있습니다. 치유하는 소리, 위로하는 소리, 평안함을 주는 소리, 희망을 주는 소리를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십자가와 복음의 울림이야말로 세상이 찾던 바로 그 소리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습니다. 복음 전파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요, 우리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소망의 소식을, 기쁨을 잃은 사람들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하라고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내가 입을 열어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그들에게 들려주어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단순히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복음의 기쁨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사순절 제13일/ 2월24일(수)/ 마10:5-15/ 평안하기를 빌라
그리스도인들은 전자 우편이나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면 "샬롬!"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곤 합니다. 샬롬은 '평화', '평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샬롬"이라고 말할 때, 샬롬은 그 사람과 나누는 인사가 되고, 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샬롬'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인사이며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샬롬'과는 거리가 멀기만 합니다. 온 사회와 가정에도 분쟁과 불화가 가득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도 온갖 갈등과 원망과 분노와 미움이 득실거립니다. 비난과 저주, 험담과 욕설이 난무합니다. 죄로 인하여 '샬롬'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샬롬'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샬롬'을 위해 오셔서 '샬롬'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주님은 그 피 값으로 '샬롬'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더할 것이 없는 평화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가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찾아와 샬롬을 주셨듯이 우리도 갈등과 분열로 얼룩진 곳에 찾아가 샬롬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14일/ 2월25일(목)/ 행20:17-25/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매여 삽니다. 주위를 보면 돈에 매인 사람, 유행에 매인 사람, 인기나 명예에 매인 사람, 쾌락에 매인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 중 무엇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온 삶에 대해 회고합니다.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주를 섬겨 왔으며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성령에 매여 주께 받은 사명을 위하여 묵묵히 달려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는 성령의 가르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령에 매여 복음 전하는 사명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성령에 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에 매여 사는 사람은 주께 받은 사명을 위하여 달려가는 자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명을 잊지 않습니다. 회사를 다니든, 장사를 하든, 환자를 돌보든, 운동을 하든, 집안일을 하든 항상 그 마음은 성령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오늘도 성령에 매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갑시다.
▣사순절 제15일/ 2월26일(금)/ 딤후2:1-13/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고난이 없는 삶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난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난으로부터 면제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모든 고난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은 고난을 이기게 하며 예수님과 함께 받는 고난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합니다. 고난 앞에 낙망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의지한다면 성령께서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잃지 않고 성도의 품위를 유지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주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범사에 총명을 주심으로 좋은 병사로, 경기에서 승리하는 자로, 곡식을 받는 농부로 서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될 것을 약속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은혜 안에 거하며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차지하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의 고백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좋은 병사가 되어 능히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고난을 감당하는 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사순절 제16일/ 2월27일(토)/ 벧전5:1-11/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토록 '성공'을 바라면서도 막상 '성공'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성공'을 꿈꾸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 앞에 성경은 '성공'대신 '영광'을 말씀합니다. "성공하는 인생"보다 "영광스러운 인생"을 꿈꾸라고 합니다. "성공한 사람"보다는 "영광의 관"을 쓰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그분의 고난에 참예함같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할 것임을 확실히 증거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그 정체성을 잃지 않고 맡겨진 소임을 다할 때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의 몸 된 교회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감깐의 영광을 좇아 성공을 바란다면 우리는 허무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몸 된 교회 안에서 주의 영원한 영광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꺼운 마음으로 양무리를 치고, 겸손한 삶을 살고, 마귀를 대적하여 근신하여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목자장이신 하나님께서 영광의 관을 우리를 위해 준비하심을 믿으며 눈에 보이는 성공을 따르지 않고 각자에게 주어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17일/ 2월29일(월)/ 요14:25-31/ 평안을 너희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만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2:17)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최초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 안에 있을 때 아담과 하와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이 약속이 깨어질 때 참 평안도 함께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평안하기 위해 부를 쌓기도 하고, 여러 방법들을 찾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참 평안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로 오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우리의 영혼을 부요케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에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과 아픔 속에서 있던 제자들에게 주신 주님의 평안의 말씀을 기억해 봅시다. 내 안에 잠잠히 임하는 주의 평안을 경험하고, 그 평안으로 세상을 이기고 평화를 이루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18일/ 3월1일(화)/ 요16:25-33/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첫 번째 역설은 진리이신 에수님깨ㅔ서 이 땅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미워하고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미워한 세상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미워하고 핍박했습니다. 두 번째 역설은 성자이신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늘 영광에 합당하신 예수님은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가장 낮은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기독교가 역설의 종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역설은 모두가 절망이요, 끝이요, 패배의 자리라고 여겼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승리를 선포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모두에게 버림 받고 홀로 남겨진 십자가 위에서 에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십니다.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하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만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신 승리의 선포가 오늘날 우리의 선포가 될 것이며,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 제19일/ 3월2일(수)/ 시편131:1-3/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평온한 장소를 들라면 어머니의 품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본능적으로 어머니 품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내면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본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심령의 평온함을 어머니 품에 안긴 젖 뗀 아이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실상 다윗의 삶은 그 누구보다도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일들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이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평온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종종 스스로 만든 덫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생의 정욕과 자랑에 매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루지 못할 헛된 망상을 따라가기에 우리는 평온함과 안식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 누려야 할 안식을 위해 우리 안에 있는 욕망과 집착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주님 품 안에서 안식하는 신앙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 품에 내 자신을 온전히 맡길 때 엄마 품 안의 아이와 같이 세상에서 누리지 못하는 영혼의 참된 평안과 평안이 주는 힘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 제20일/ 3월3일(목)/ 마10:16-23/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길에는 여러 종류의 길이 있습니다. 험한 산길이 있는가 하면, 평탄한 들길이 있습니다. 곳곳에 낭떠러지가 있는 위험한 길이 있는가 하면, 한가로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잘 닦인 길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랐던 바울은 수많은 위험을 당하였고, 또 수호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며, 주리고 목마르며, 춥고 헐벗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분이 가셨던 그 길로 보내시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지혜롭고 순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또한 여러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염려하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친히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환난과 핍박 그리고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믿고 있듯이 주께서 언제나 우리를 위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한순간도 혼자 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변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주의 길을 갈 때 걱정, 근심으로 염려하기보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잠잠히 구합시다.
▣사순절 제21일/ 3월4일(금)/ 마11:25-30/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세사의 기준에서 보면 더 많은 지식과 부, 힘과 권력을 소유한 자들이 더 많은 것을 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세상과 반대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낮은 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역설의 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들에게 임합니다. 주님 앞에 어린 아이와 같지 않은 것은 교만입니다. 주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까? 주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내가 가진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보시기에 교만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나 실제로는 어리석은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구주가 되기 원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십시오.
▣사순절 제22일/ 3월5일(토)/ 사53:4-6/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삶에서 많은 아픔과 인내를 안고 살아갑니다. 비록 자신은 힘들지만 자기 자녀가 더 행복하고 평안한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는 마음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부모님의 희생과 눈물이 있었기에 평안과 보호 속에서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고통과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로, 우리의 죄 때문에 결코 이 땅에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고통당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이 땅에서 진정한 평화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나음을 입고 평화를 누리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평화를 염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 참된 평화는 없습니다. 오직 참된 평화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평화로 오신 예수님을 경험했다면 내 주위에 있는 이들과 이 소식을 나눠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아아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평화가 전해지기까지 기도하며 평화를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23일/ 3월7일(월)/ 막3:31-35/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내가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나의 필요대로 주께서 움직여 주시길 바라며,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내가 기도한 대로만 응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과 합일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음성에 불만을 표출하거나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상충될 때, 하나님을 외면한 채 내 뜻을 내세우려 합니다.
이런 순간에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기도 속에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삶은 자신의 뜻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현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한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곳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24일/ 3월8일(화)/ 삼상18:1-5/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3). 타인을 사랑할 때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행동은 철저한 자기 희생과 포기로만 가능합니다. 본문에서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쫓기는 다윗을 위해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다윗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도망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는 요나단이 친구 다윗을 자신의 생명과 같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일보다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달은 자만이 자기를 부인하고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 드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나를 친구 삼아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예수님과 같이 목숨을 내어 주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줌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흘러가게 합시다.
▣사순절 제25일/ 3월9일(수)/ 삼하23:13-17/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본문은 자신이 섬기는 다윗 왕을 위해 헌신을 마다하지 않은 세 용사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지휘하는 군대가 르비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는 불레셋 군대와 대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더운 날씨에 목이 말랐던 다윗은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간절히 마시고 싶어 했습니다. 용사 세 사람은 이러한 왕의 말을 듣고 함께 블레셋의 진영을 뚫고 베들레헴 우물로 향하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다윗에게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의 용감한 행동은 자신의 왕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왕을 섬기는 일을 위해서라면 큰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길어 온 물을 받아 든 다윗은 그 물을 그들의 피와 같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자신이 마시지 않고 여호와께 부어 드렸습니다.
우리에게도 다윗의 용사들과 같이 마땅히 섬겨야 할 왕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군사로 모집된 자는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왕에게 충성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다윗의 용사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마땅한 충성을 다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26일/ 3월10일(목)/ 빌2:19-30/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 생사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방 전도사명을 통해 예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본문에는 이러한 사도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여러 동역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특히 에바부로디도는 병들어 거의 죽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섬기며 바울과 함께 동역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목숨까지도 돌보지 않는 에바브로디도의 헌신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헌신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동역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바울 사도는 험난한 이방에서의 전도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 복음 전파를 위해 함께 동역하는 자들을 떠올려 봅니다. 하나님 나나를 향해 가는 순례의 길에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분들이 있기에 우리는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함께 믿음의 길을 가는 동역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 봅시다. 혹 힘들어하는 동역자가 있다면 살며시 손을 내밀어 잡아 주고 격려해 줍시다. 복음을 위해 동역하는 헌신의 기쁨을 맛보는 사순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27일/ 3월11일(금)/ 골3:12-17/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한 살인자가 어느 시골에 숨어 지내다가 농부의 고발로 인해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살인자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중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고발한 농부를 여전히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하루 전날에 전혀 모르는 한 수녀가 면회를 와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명상하고 애써도 용서할 수가 없어서 너무 괴롭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는 "용서에 무슨 조건이 있나요? 다 용서해야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수녀가 말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지금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은 내 오빠를 죽였습니다. 당신이 죽인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내 오빠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을 용서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가 용서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마땅히 용서를 베푸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28일/ 3월12일(토)/ 시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사는 것만큼 보기에 좋은 삶은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서로 불협하고 반목하는 삶은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말씀은 지극히도 기쁜 감탄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보기에도 흐뭇하고 좋은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도 합한 모습입니다. 더구나 이처럼 연합하여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때 그들에게는 끊임없는 기쁨이 함께하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감탄은 성경말씀 속에서만 들리자, 우리 주변에서는 연합의 아름다움을 기뻐하는 이러한 감탄이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연합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야만 합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히 13:1),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와 같은 구절들은 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연합하는 일은 하나님의 부탁입니다. 우리는 성도 간에도, 이웃 간에도 아름다운 동거와 사랑의 모습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나님의 한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순절 제29일/ 3월14일(월)/ 막8:27-38/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예수님이 이 땅에서 완성하시려는 사역은 죽음과 희생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베드로는 자신이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조차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보지 못하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만 합니다(34절).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자기를 부인하는 일과 십자가 고난을 스스로 짊어지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고 손해를 보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만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죄인 된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릉ㄹ 우리 삶의 최우선에 놓읍시다. 그리할 때 비로소 사람의 일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만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주님 앞에 칭찬받는 자녀요, 제자가 되도록 합시다.
▣사순절 제30일/ 3월15일(화)/ 막14:3-9/ 힘을 다하여
본문에서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이 사건은 진정한 섬김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동일한 사건을 이야기하는 누가복음 7정에서는 누구도 예수님께 발 씻을 물조차 주지 않았고, 예수님께 입 맞추지 않았으며,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무엇이 필요한지, 에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화를 내며 향유를 허비하는 것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매우 값진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준비한 향유와 더불어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주 예수 앞에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가실 길을 준비하는 자입니까? 혹시 믿음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너무 많은 걱정과 고민들로 마땅히 행할 바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31일/ 3월16일(수)/ 마21:12-17/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매매하는 자들과 환전상들을 쫓아내신 성전정화의 장면은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은 성전을 가득 메운 장사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성전을 찾는 자들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시장이었으나, 점차 대제사장들과 상인들의 이권만을 위한 시장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 소리만이 가득해야 할 하나님의 전에는 온통 물건을 사고파는 소리와 비둘기들의 울음소리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깨워 주시며 '강도의 소굴'이 되어 버린 하나님의 전을 맹인과 저는 자들을 치유하는 구원의 장소로 회복시키십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까? 섬김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속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성찰해 봅니다. 상한 심령을 가지고 교회를 찾는 이들을 예수님과 같이 치유하고 놀라운 회복을 선포할 수 있는 교회, 그래서 젖먹이들의 찬미가 끊이지 않는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 제32일/ 3월17일(목)/ 요12:23-33/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본문은 내가 뜻하는 바와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어떠한 모습으로 순종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시는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한 알의 밀알이 썩어지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길은 영광의 길이요, 참된 순종의 길이었지만 외롭고 고독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더불어 이를 이루기 위한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과 고난을 이겨 내며,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일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내 육체를 힘들게 하고 내 영혼을 낙심하게 하는 일인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 수많은 환영의 인파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던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해 보십시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순종의 자녀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순종, 그 다음에 영광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사순절 제33일/ 3월18일(금)/ 눅22:39-46/ 내 원대로 마시옵고
감람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떨어져 무릎을 꿇고 간절한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애쓰고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감람산 기도를 통해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그 고통을 가늠해 보게 됩니다. 고난을 앞에 두고 갈등하시는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되길 원한다고 고백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 아버지의 인류 구원을 위한 필연적인 계획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토로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의지와 생각과 마음을 맞추어 가는 순종을 이룬다면 바로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순절 제34일/ 3월19일(토)/ 눅22:47-53/ 이것까지 참으라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병들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을 막기 위해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쳐 떨어뜨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것까지 참으라."였습니다. 그리고 다친 자의 귀를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잡히심은 부당한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옭아매려는 사람의 상처까지도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으나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심으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더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몸소 이루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많은 부조리함과 불합리함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마음의 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다치게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도리어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의 상처까지도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누구보다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누구보다 큰 고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기억한다면 능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순절 제35일/ 3월21일(월)/ 마21:33-46/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건축자란 돌의 모양과 결, 강도을 살펴 각각의 돌을 적합한 용도로 사용하는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버린 돌이라면 그것은 거의 쓸모없는 돌이 명백할 것입니다. 이렇게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건 상식을 초월하는 새로운 변화를 의미합니다. '머릿돌'은 건물의 하중을 견뎌 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돌로, 기초와 토대와 같은 핵심적인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머릿돌은 무엇인가요? 세상은 가문, 재산, 학벌, 지연, 외모 등을 인생의 머릿돌로 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머릿돌은 인간들의 머릿돌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시면서도 왕궁 아닌 구유에 오셨고, 영광의 보좌 대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모두가 어리석고 가치 없다고 여겼던 죽음의 길은 우리의 영원한 머릿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길이 되었습니다.
버림받은 돌이 모퉁잇돌이 되는 역사를 이루신 주님 앞에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하는지 성찰해 보며, 내 삶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순절 제36일/ 3월22일(화)/ 마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수님은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온 선지자들을 죽이고 핍박하였던 저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였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무리들에게 주신 최후의 말씀으로, 예수님은 지금 은총을 거역하는 예루살렘이 당하게 될 운명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그런 운명에 처하게 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항상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배척하였습니다. 때리고 돌로 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수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천 년 전에도 그랬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애타는 마음으로 그들을 긍휼하게 여기며 탄식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이 땅을 향해 동일한 탄식으로 눈물을 흘리십니다. 이제 그 예수님의 애타는 마음을 외면하지 맙시다. 돌이켜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응답함으로, 이 세상의 선지자로 나를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립시다.
▣사순절 제37일/ 3월23일(수)/ 고전1:18-25/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의 도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한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형편없는 미련함이며 터무니없는 어리석음"이고, 다른 한 편에서는"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부름받지 못한 이들에게 십자가의 도가 주는 인상은 전자와 같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흉악범이나 정치범들의 처형 도구인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자기 민족에게조차 배척받은 이가 인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야라는 바울의 선포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바로 그 '십자가'라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그것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은 자에게만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체험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수많은 선택들 속에서 십자가의 도는 지나칠 정도로 미련하고 무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것(25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며, 인생의 길을 찾고 또 진리를 전하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사순절 제38일/ 3월24일(목)/ 요13:1-11 /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 땅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열 재앙 사건 당시 희생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죽음을 면했던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며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겨 주셨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예수님이 어느 제자의 발부터 씻겼을까?"라는 상상력 풍부한 질문을 던지며 "가룟 유다의 발부터 씻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자를 먼저 사랑해야 전체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법'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 자세로 사랑을 베풀면 모두를 사랑할 수가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랑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체의 여러 부위 중 가장 낮고 더러운 발을 씻기시되 그 사랑을 배신할 가룟 유다까지도 품어 주셨던 예수님이 하신 당부의 말씀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입니다. 이 말씀 앞에 지금 나는 어떤 응답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찾아가 발을 씻어 주어야 할 사람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주님이 주시는 용기로 다가가 봅시다.
▣사순절 제39일/ 3월25일(금)/ 시22:1-18 /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 속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외침은 메시야에 대한 말씀인 시편 22:1 말씀의 성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인간이 만든 최악의 처형 도구인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예수님은 철저한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 죄인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상태를 경험하셔야만 했습니다.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교제 속에 계셨던 예수님에게 이 단절은 아바 아버지께 버림받은 처절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을 향한 성부 하나님의 철저한 외면과 단절은 역설적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보여 줍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 주신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때문에 저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확증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주님 앞에 서야 할까요? 또한 그 은혜를 입은 자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 사랑을 삶으로 보여 주는 내가 됨으로 그 크신 사랑에 조금이라도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40일/ 3월26일(토)/ 시43:1-5/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본문에서 다윗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고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믿음과 기도로 하나님께 소망 두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이끄심과 도우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 비로소 강한 능력을 얻게 됨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삶의 완전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스스로 자신을 버리는 자리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 죽음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모든 인류의 부활을 창조해 주셨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많은 시험과 낙심의 상황세서 속절없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며 담대히 이 모든 것들을 뚫고 나아갈 힘과 소망의 근거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면, 분명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위와 같은 찬양이 끊이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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