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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사순절의 깊은 묵상
운영자 2017-03-01 추천 0 댓글 0 조회 1897

사순절 제1일 -  3월1일(수)/ 욥 42:1-6/ 티끌과 재 가운데 나아가

올해도 우리는 "재의 수요일"을 맞이했습니다. 재는 곧 어떤 물질이 타고 남은 찌꺼기 가루로서 성경에는 무가치함, 멸망, 슬픔 등의 의미을 표현할 때 쓰였습니다. 인간은 곧 한 줌의 재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오랜 옛날, 장수함으로 죽음을 부정했던 사람들은 '여호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인간은 죽음을 이길 수 없다''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가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에모스'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4:26). 그것은 죽음을 이길 구원이 여호와께 있음을 믿고 그분께 예배했다는 말이겠지요. 에노스의 아버지 셋은 그러한 사실을 절감하며 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오늘 나는 나의 삶에 불혔듯 찾아올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광대하심, 그 눈부신 빛은 오늘도 여지없이 내 존재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 빛 앞에 설 때 나는 영원한 가치와 세속적 가치를 여실히 구별하게 됩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는 욥의 고백은, 그가 하나님을 앎과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존재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욥은 바로 그 빛이신 여호와를 만난 것입니다. 한 줌의 재와 같은 존재인 나를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제 욥과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2일 -  3월2일(목)/ 사 53:1-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기독교는 대속의 신앙입니다. 대속이란, 대신하여 죄의 값을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노예로 살던 인간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그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바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의 노예와 포로로 있던 자를 해방시켜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속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긍휼이 넘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평생을 두고도 절대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 금액인 만 달란트를 빚진 종에게 탕감의 은혜를 베푸는 임금이 나옵니다. 과연 그 탕감의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한마디만을 언급합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마 18:27).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치러야 할 죄의 값, 내가 받아야 할 정죄, 저주, 형벌, 고통을 차라리 내가 당하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갚을 길 없는 은혜와 긍휼을 입은 자로서 그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주님께 받은 대속과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내가 받은 주님의 은혜가 상대방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사순절 제3일 -  3월3일(금)/ 요 3:12-17/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올린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민 21: 4-9). 광야 길, 불뱀에 물려 죽어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뱀은 저주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와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주님은 친히 장대에 매달린 뱀,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들린다"는 것은 만천하에 정죄되고,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내 영혼은 살 수 없습니다. 바라볼 때마다 다른 음성, 다른 은혜로 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예수님을 나는 과연 얼마나 많이 만나 보았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뱀에게 물렸으도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죄에게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사순절 제4일 -  3월4일(토)/ 빌 2:5-11/ 죽기까지 복종하심

주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은 철저한 비움과 낮춤과 순종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6절)라는 말과 "종의 형체"(7절)라는 말을 통해,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참 인간, 즉 실제로 완전한 종이 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되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비아 돌로로사"(고통의 길, 슬픔의 길)라고 부르는 그 길은 아버지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길만을 목적으로 삼고 삶의 여정을 걸으시던 예수님과 동행하였던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더 높은 지에 대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혀 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높은 영광의 자리를 향해 가신 것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나의 모습이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가장 낮은 자리를 향해 가시던 예수님께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종의 형체로 비우사 생명까지 버리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하늘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높은 자리가 아닌 더 낮은 자리로 인도해 주시기를 구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사순절 제5일 -  3월6일(월)/ 마 21:12-17/ 내 집은 기도하는 집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제사장의 비호를 받는 장사꾼들의 재물을 사다가 성전에거 흐생제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먼 고향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희생재물을 끌고 오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고, 성전 제사장에 의해 '흠 없는 짐승'으로 합격를 받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희생제사에 필요한 땔감, 포도주, 기름, 소금 역시 비싸게 매매되었고, 성전세를 이스라엘 화폐로 바꾸기 위해 환전상에게 수수료를 내야만 했습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할 성전과 희생제물이 이렇게 장사꾼들의 폭리를 취하는 도구가 되어 버린 것을 보신 예수님은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내쫒으시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나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탐욕과 영리의 목적으로 더럽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룩을 위장하여 누군가의 마음과 물질을 도둑질하는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하나님의 성전은 위선과 위장을 벗긴 정직함과 수치,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나아오는 곳입니다. 내가 속한 예배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하여 내 마음속에 거룩으로 위장된 탐욕과 세속적 교만함을 버려야만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6일 -  3월7일(화)/ 고전6:9-11/ 세상에 맞서는 자

사도 바울 당시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라는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언덕 높은 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전에는 많은 여사제들, 곧 창기들이 고용되었고, 종교적인 미명 아래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범죄들이 자행되었습니다. 이렇게 만연한 성적인 타락과 부정한 것들이 교회 안에도 들어왔습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부패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불의한 자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불의는 곧 음행,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탐욕, 술 취함, 모욕, 속여 빼앗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나는 세상에 맞설 뿐만 아니라 세상의 걸림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며,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도록 내 삶에 주신 유업인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나는 어떤 말과 행함으로 세상에 맞서고 있습니까? 오늘 내 자신에게 그리고 가족들에게 성경적인 말과 행동으로 대해 봅시다.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기쁨을 흘려보냅시다. 세상에 맞서는 자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속히 완성될 것입니다.

 

사순절 제7일 -  3월8일(수)/ 미6:9-16/ 어느 길에 서 있습니까

미가 선지자 당시 남유다는 앗수르의 침공, 북이스라엘과의 불화, 경제적 불황, 지도충의 부정과 부패 등 심각한 문제에 처해 있었습니다. 미가는 먼저 정치, 경제, 종교 지도자들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들은 사람과 집과 산업을 강탈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였습니다. 나아가 미가는 강포가 가득한 부자들과 거짓을 말하는 주민들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행한 것이 아니므로 오므리의 율례와 그 뒤를 이은 아합 왕의 행위를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주변국들과 협상하였고, 자국의 백성들을 핍박하며 그들의 것을 갈취했습니다.

  지금 나는 일터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내 삶이 지배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 자칭하면서도 교묘하게 약자를 협박하거나, 법을 악용하고, 힘 있는 자들 뒤에 서서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미가가 외친 심판의 경고는 내 삶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율례와 오므리의 길 가운데 어느 곳으로 가야 하겠습니까?

 

사순절 제8일 -  3월9일(목)/ 합1:1-4/ 하나님의 정의가 실행되는 나라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한 BC612-605년경 고대 근동 지역에는 신흥 제국 바벨론이 급부상하였습니다. 근동 북부 지역의 패권국이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이 BC612년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었고, 근동 남부 지역의 강국이었던 애굽도 BC605년 바벨론과의 갈그미스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마침내 신흥 강대국 바벨론은 남유다를 공격하여 왕을 폐하고 유대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갈 길을 잃은 남유다는 그 종교적, 도덕적인 타락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통치자들은 강대국에 조공을 바치기에 급급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고 압제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주의 종들이 살해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앗수르, 애굽, 바벨론 및 국내 통치자들이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탄식하고 탄원하였습니다. 나는 지금 우리 나라에 하나님의 정의가 실행되길 간절히 탄원하고 있습니까? 정의가 무너진 한국사회, 여기에 이 땅의 교회와 교인이 범죄한 것은 없습니까?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보고 탄식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닙니까? 내 삶과 우리 교회의 모습을 들고 하나님 앞에 탄식하며 탄원함으로, 또 회개함으로 나아갑시다.

 

사순절 제9일 -  3월10일(금)/ 창6:5-8/ 하나님의 위임명령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마음으로 계획하는 것이 악한 것을 보시고 한탄하셨습니다. 이 한탄은 인간을 향한 한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스리라 위임하신 피조세계마저 인간의 탐욕과 무절제함으로 병들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지난해부터 이어진 AI재앙은 공장식 밀집사육이 낳은 폐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합니다. 이는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토양 및 수질까지 오염시켰습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이 초래한 비극이자 댓가였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으 한탄과 심판 속에서 우리는 이를 멈출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계획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라 인정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니다. 선한 것이란, 생명 살림에 있습니다. 이 세상을 우리의 후손이 살아갈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만큼 적절한 정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지구 생태계가 평화롭게 생존하도록 하라는 명령은 비단 아담뿐 아니라 바로 나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청지기로 부름받은 내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을 잘 돌보기 위해 내게 주신 시간과 재능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심판하실 주님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10일 -  3월10일(토)/ 롬1:28-32/ 상실한 마음

28절의 '상실한 마음'은 '타락한 마음', '올바르지 않은, 가치가 없는 마음'으로도 번역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서 상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품는 일들은 합당하지 못한 일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우리는 끊없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반역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세 절에 걸쳐 온갖 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29-31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마음이 채울 때, 그 사람은 결국 사형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32절).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도록 만드는 것일까요? 손해 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내게 돌아올 이득을 다 챙기지 못할까 봐, 주변 사람들 눈에 어리석어 보일까 봐, 좇아 왔던 쾌락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할까 봐 내 마음에 내가 사는 것입니다. 맘몬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열매만을 결실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마지막 날의 심판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마음에 다시 모셔들이기 원합니다. 주의 말씀이 내 의지와 생각과 마음을 채우고, 주님이 합당하다고 여겨 주시는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사순절 제11일 -  3월13일(월)/ 왕하22:8-13/ 내 마음을 두드리는 말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민족의 근본적인 위기는 외세의 공격이 아니라 말씀을 잃어버렸기에 찾아왔습니다. 패역한 왕으로 평가되는 요아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요아스는 성전을 수리하고, 그의 통치 18년째인 BC621년경에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이 개혁은 대제사장이었던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면서 시작됩니다. 그 율법책은 서기관 사반의 손에 넘겨지고, 사반은 그것을 왕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옷을 찢으며 통회합니다. 그리고 힐기야에게 그의 백성과 온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께 묻게 합니다. 마침내 요시야 왕은 돌이켜 율법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온 나라의 우상과 산당을 없애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사령탑이었던 지도자로부터 시작된 개혁이 온 국민의 신앙개혁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왛아 23:1-25).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의 재발견을 통해 일어납니다. 적에게 나의 중심을 내어 주는 패배는 말씀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요, 적에게 정복당한 나의 심령을 세우는 일은 오직 나의 심령이 말씀을 만나 말씀의 찔림을 받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을 통한 개혁은 개인과 나라와 인류의 앞날을 새롭게 재건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골수를 쪼개어 뜨겁게 깨달아지는 역사가 나에게 일어나기를 사모합시다.

 

사순절 제12일 -  3월14일(화)/ 마5:27-32/ 말씀 안에서 존귀한 가정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 성경의 계명(출20:14 ; 신5:18)은 유대교 문헌에서 순결의 요구와 더불어 절도의 문제로 다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간음으로 보며 그 범주를 넓혀 반순결, 절도행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싸워 나가고 있습니까? 혹시나 나의 죄된 생각이 그저 누구에게나 스쳐 지나가는 본성적인 것일 뿐이라고 치부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를 이기는 힘은 주의 말씀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막 10:9)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 옆에 주신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존재입니다. 이 보다 더 귀중한 사람은 어느 곳에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살아간다면 그로부터 고백되는 감사 고백이 더 깊은 사랑의 지경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임을 알지만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우리는 주님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주님이 아내 안에 계시고 주장하실 때 단호한 결단으로 죄를 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생명수 되시는 주님의 뜻에 귀 기울입시다. 그러할 때 도둑질하지도 도둑질당하지도 않게 됩니다.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순결한 자녀로서 가정을 세워 가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13일 -  3월15일(수)/ 미6:6-8/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언약을 위반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고소에 이은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어떻게 여호와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종교적 행위나 제물의 분량에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드리는 헌신입니다. 8절은 이를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마음 자세와 그에 합당한 행위가 함께 동반되지 않은 희생 제사는 그 제사의 목적을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기준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영적인 예배를 원하십니다. 그 기준은 바로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일터에서 마땅히 드릴 예배는 정의, 인자, 겸손으로 갖춰진 행함입니다. 나는 어디에서나, 무엇을 하거나, 누구를 만나거나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이 되는 행함과 말, 선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약자를 소홀히 여기거나, 돈이 우선되는, 인간성과 인격이 무시되는 상황에서 혹시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내 삶의 방향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순간은 하루를, 하루는 일 년을 세워갑니다. 행함으로 예배드릴 때, 나의 일터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로 한층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순절 제14일 - 3월16일(목)/ 눅19:37-44/ 평화의 길을 만드는 사람들

'평화'는 철저히 공동체의 속성을 지닌 단어입니다. 내 주변과 나의 조국까지도 함께 떠올리게 하는 단어가 평화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와 거부하는 무리가 나옵니다. 백성들은 평화를 갈망한 반면, 당대 기득권층인 바리새인들은 저항했습니다.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평화를 누리는 자와 책망하는 자로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유형의 덫을 보셨습니다. 환영하는 이들의 목적은 복음이 아닌 기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복음은 기쁨의 소식이었지만, 그 복음은 거절당하거나 성공의 수단으로 철저히 외면당하고 말았습니다.

  2,000년 전 그토록 외면당한 복음을 나도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만의 평화, 곧 나만의 안위와 안녕을 위해 복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까? 나에게 전해진 복음이 세상에 흘러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진정 평화를 전하는 기쁨의 소식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동서간의 분열을 엮고, 남북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고통을 함께 나누어 지는 연대가 곳곳에서 일어나도록 교회가 나설 때입니다. 더욱 힘써 복음이 복음다워지도록 합시다. 평화로 가득 찬 하나님의 나라를 주님은 오늘도 눈물로 촉구하고 계십니다.

사순절 제15일 - 3월17일(금)/ 롬8:19-22/ 우리는 운명공동체

인간과 피조물은 공동운명체입니다. 각 피조물은 각기 고유한 영광을 지니고 있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본의 아니게 허무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갈망하시듯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의 자유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이 자기만의 타락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피조물의 타락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19절은 구원엣 대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피조물의 회복은 하나님의 아들들 곧 성도의 영광의 회복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본래의 영광과 자유를 회복해야 할 필연성이 여기에 존재합니다. 피조물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을 위해 그토록 탄식하며 신음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출현을 바라거늘, 인간이 자신의 회복을 위해 어찌 탄식하며 신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구원 얻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피조세계의 회복에 대한 책임이 뒤따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류에게 복을 주시며 피조세계의 소산을 허락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인간은 피조물의 수혜자로서 인간의 죄로 피조물을 억압한 것에 대한 뉘우침은 물론, 피조물을 통해 받은 복에 감사하며, 피조물의 가치와 그 존재의 소중함을 재별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늘도 피조세계의 회복을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16일 - 3월18일(토)/ 호6:1-3/ 가던 길을 돌이켜 여호와께로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 호세아에게 당대 이스라엘의 현실이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의 모습은 참혹했습니다.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4:2).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음란과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시고, 음란하여 남편을 떠나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인 그녀를 또다시 아내로 맞아들이게 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은혜와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근본 문제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하나님을 잘못 아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온몸과 삶으로 아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살아 계시고, 이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알고, 믿으며, 그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호 4:1). 만약 나의 삶이 이 말씀과 같다면 더 늦기 전에 여호와께로 돌아가기로 결단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성도의 길입니다.

사순절 제17일 - 3월20일(월)/ 왕하23:1-9/ 요시야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자 칼뱅은 "개혁된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들어 내는 공장과 같습니다. 죄성이 가득한 우리는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믿음에 붙들려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드리고도 다음 날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내 마음의 주인을 다른 것으로 바꿔 치우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기준 삼아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 오늘날 '저항자'라는 의미를 지닌 개신교 신자들이 오히려 저항하라는 단어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도리어 세상에 순종적이고 기존 체제를 긍정합니다. 개혁도 저항도 없는 개혁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개혁을 단행합니다.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과 우상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아세라 상을 불살라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성전 가운데 있던 남창의 집을 헐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행동 속에서 우리는 저항의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저항하는 개혁자의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날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 않으면 소외되는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교회 안에 가져옴으로 또 다른 우상의 형상들을 만든 것은 아닌지요? 날마다 들리는 주님의 말씀을 하루하루 개혁의 정신으로 삼아 행하는 개혁자의 인생을 살아야겠습니다.

사순절 제18일 - 3월21일(화)/ 신6:4-9/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공동체를 통해 일하십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인류의 첫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첫 가정은 죄로 인해 깨어졌고, 하나님께서는 확장된 가족인 민족공동체를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시 이루어 가십니다. 출애굽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네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책임지신다는 놀라운 체험적 신앙을 자손 대대로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지녀를 하나님으 지녀로 맡겨 드리는 부모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가정 안에 역사하시도록 문을 열러 드리는 부모입니다.

  현대에는 1인 가구가 현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정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멀리 흩어진 가족이 있습니까? 내버려 둔 가족 안의 상처가 있지는 않은지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 안에 살아 역사하심을 기억하며, 가족 구성원들 안에 이해와 용서의 마음이 깃들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서로 섬기고 사랑하기를, 그리고 주님께 순종하기를 예수님을 닮아 행하는 가족이야말로 어두운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사순절 제19일 - 3월22일(수)/ 엡1:7-12/ 주님의 예정을 입은 자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속량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모든 것을 통일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 즉 계획하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꿈은 교회와 성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꿈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거나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도 이루어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 가운데 살았기에 심판받기 마땅했던 니느웨 백성들마저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땅에 하나님의 사람 요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요나와 같은 자를 찾아 세상 가운데 보내기 원하십니다. 일터와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경륜을 선포하는 바로 이 시대의 요나입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아직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20일 - 3월23일(목)/ 미4:1-5/ 평화를 일구는 도구로

 

기원전 8세기경, 시골 출신 선지자 미가가 살았던 시대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산헤립과 히스기야의 전쟁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미가는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악행을 지적하고, 예루살렘의 심판과 멸망의 경고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4장에 들어서면서 끝 날에 이방 민족들이 성전에 계신 여호와를 향하여 돌아올 것을 예언합니다. 전쟁과 포로로 끌려갔던 저들이 마침내 돌아와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것을 선언합니다. 그들을 억압하고 괴롭혔던 이방인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말합니다. 그렇기에 이때까지 전쟁에 썼던 칼과 창을 보습과 낫으로 새롭게 만들어 평화를 일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을 향해 가지시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선포하신 하나님께서만 성취하실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와 세계정황은 전쟁과 테러,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인해 평화가 산산조각 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전쟁을 위한 최첨단 무기들이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국가재정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 역시 내가 속한 사회에서 이기기 위해 많은 무기를 만들지는 않습니까? 마음의 무기를 평화의 도구로 바꾸어 평화의 나라를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경쟁보다는 협력을, 욕식보다는 양보와 나눔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아주 미약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변화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평화의 나라가 나를 통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사순절 제21일 - 3월24일(금)/ 사11:1-9/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1절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말한 것은, 메시야의 탄생을 예언한 것입니다. '줄기'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의 원형을 보면, '베어 넘어뜨린 나무의 밑동'을 의미합니다. 이는 생명의 기운을 찾을 수 없는 완전한 파멸을 상징합니다. 실제로 유다는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에 이어 헬라와 로마의 침공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과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찍히고 잘려 나가 말라비틀어진  나무 밑동처럼 비참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유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가 무너지고, 도덕과 종교가 피폐할 만큼 허물어져 있습니다. 더욱이 생태계까지 심각하게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본문은 한 가지 소망을 예언합니다.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어린 싹이 돋아나서 회복되고 크게 성장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을 뜻합니다. 그 결실의 때에 이리와 어린 양이 해치지 않고 함께 사는 평화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죽어짐같이 이새의 줄기에서 나신 예수님이 열매 맺으심으로 인류를 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희생의 열매를 맺을 때에만 이 피조세계에 평화와 회복의 열매가 결실하지 않겠습니까?

사순절 제22일 - 3월25일(토)/ 롬12:1-2/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로마서 1-11장의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의 은총이 우리를 살리셨다는 내용의 압축입니다. 이 말씀 뒤에 바울은 권면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기에, "그러므로"우리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권면입니다. 때문에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안내서 같은 말씀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짐승을 바치는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날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임을 강조합니다. 제물인 짐승 대신 내가 죽은 것입니다.

  즉, 일회적 제사에서 매일 드리는 삶의 제사로의 개혁입니다. 제사 자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부여하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표헌하며, 하나님과 백성의 언약을 체결하고, 유지해 나갈 뿐만 아니라, 회상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사임을 알고 있습니까? 아침에 집을 나설 때에도, 밀리는 대중교통 체증 속에서도, 업무에서 만나는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습니까? 오늘은 어제와 달리 세상을 거스르며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삶의 예배를 준비해야겠습니다.

사순절 제23일 - 3월27일(월)/ 고전1:1-9/ 거룩하여진 성도, 교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소스데네를 형제로 언급하며, 그들에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빌며 시작합니다. 소스데네는 어떤 사람일까요?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당시 고린도가 속해 있는 아가야의 총독 갈리오는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을 권한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한 바울에 대해 관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고소를 취하합니다. 이로써 고린도 지역의 유대 종교는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빠지고,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와 그 후임 소스데네의 회심으로 인해 휘청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소스데네를 '형제'라고 칭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먼저 된 자나 나중 된 자나 다 한 형제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음으로 거룩하여진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사람이 평생 동안 살면서 반드시 획득해야 할 발달과제 중 하나가 "자아 정체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성도라는 자아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은 매우 기형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의 옷을 입히시고 나를 성도라 불러 주시는 주님께 응답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갑시다.  

사순절 제24일 - 3월28일(화)/ 살전4:1-9/ 부르심의 목적 

데살로니가는 오늘날 그리스 북부 동쪽의 터키와 에게 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 이곳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 열매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당시 그리스 지역은 그리스 로마로 부터 유입된 온갖 신들을 숭배하였고, 로마의 지배를 받음으로 황제에 대한 숭배도 만연하였던 곳입니다. 특히 아프로디테 신전의 예식은 그 자체로 매우 문란했습니다. 그 신전의 여 사제들이 예배하는 자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짐으로 아프로디테가 예배를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풍조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믿음과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교회가 이러한 문화와 문명 속에서 타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분명하게 구별되어 사는 것이 바로 이들을 향한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 가정이 오늘의 시대와 사조를 따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결혼에 대해 성경적 가치를 두고 가정을 위해 헌신하기 보다 시대의 유행과 흐름을 따라가기 바쁜 것은 아닙니까? 거룩함이란 오직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로서 구별된 삶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세상의 맞설 자들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 위에 지어진 가정을 잘 지키고 서로 위하며 주변에 주의 사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25일 - 3월29일(수)/ 엡6:5-8/ 주께 하듯 하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령한 복은 바로 죄 사함입니다. '속량'이란 '값을 치르고 사다''대가를 치르고 얻다'라는 의미입니다. 노예가 돈을 치르고 자유를 사거나 죄인이 돈을 지불하고 석방되는 속전을 의미합니다. 즉, 죄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 해방, 면제, 용서를 의미합니다. 당시 노예는 자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 속량할 수 있는 돈을 결코 가질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큰 돈을 지불하고 그를 사서 자유를 주기 전까지는 결코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외에 다른 것으로는 우리의 생명을 결코 살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주님의 소유가 된 우리의 삶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마지막 날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에게 주신 윗사람에게 주께 하듯 성실함과 정직함  그리고 충성과 희생의 태도로 대하면,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기억하셨다가 심판하시고 상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8절).

사순절 제26일 - 3월30일(목)/ 살전5:23-24/ 부름 받은 평화의 사도

어린 나이에 난민이 된 시리아의 한 소년은 "제발 전쟁만 멈춰 주세요.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전부예요!"라고 말했습니다.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정부군과 반정부군과의 내전, 그리고 IS와의 전쟁은 약 20만 명의 사상자, 시리아 인구 절반인 2,200만의 난민을 발생시켰습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로 인해 더 큰 위험에 노출되기를 두려워하며 난민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남북의 교류가 멈추었고, 개성공단은 폐쇄되었습니다. 또한 주변 강국으로부터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화의 일꾼'으로 부르셨으을 기억합시다. 우리를 친히 거룩하게 하신 분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힘입어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을 돕고 지원합시다. 또한 그들의 일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변 정세 가운데 주님의 거룩한 뜻을 잘 지켜 마지막 날까지 온전케 보전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의 기도대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를 본받는 교회, 본이 되는 교회, 돕는 교회가 되었습니다(살전 1:1-10). 우리도 우리의 교회와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각처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지원함으로 평화의 사역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27일 - 3월31일(금)/ 시148:3-13/ 모두 함께 찬양하려라

시편 148편에는 인간과 천사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 자연, 우주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체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찬양은 인간의 노래나 인간의 고백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찬양의 주체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피조물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드넓은 하늘을 볼 때, 그 안에 하나님게서 새겨 주신 해와 달과 별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보게 됩니다. 산에 심겨진 각종 나무들을 볼 때, 들에 핀 꽃들의 오묘한 색을 볼 때, 각종 향기를 마실 때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게 됩니다. 시편 저자는 용들과 바다,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광풍, 산들과 나무와 짐승과 새와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온 피조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찬양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모든 피조물이 그들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더 이상 환경을 파괴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과 온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도록 하는 데 나의 삶의 방향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28일 - 4월1일(토)/ 벧전1 :13-19/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레위기에서 그분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던 것과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거룩함이 유지되어야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은 사랑의 명령입니다. '거룩하라'는 것이 사랑의 명령이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죄인으로 신음하며 살아가던 우리들이 눈부신 거룩함의 옷을 입고 죽음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하신 이를 아버지라도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결국 '거룩하라'는 명령은 이 특권에 대한 선언입니다. 이렇게 특권을 가진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거룩하라는 명령은 우리의 귀에 울리는 사랑의 음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계속해서 거룩해지는 성화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나의 죄 된 습관들을 가까이 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매일 거룩함을 추구함으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생명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29일 - 4월3일(월)/ 눅23:39-43/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오늘 말씀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두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행악자 두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습니다. 한 행악자는 예수님을 향하여 무례하게 비방했지만, 다른 행악자는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잘못된 삶을 뉘우치며 예수님을 향하여 구원을 요청하며 손을 내밀게 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이 간구는 절체 절명의 상황 속에서의 간구입니다. 지금 예수님도 군중들과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로마 병사들에 의해 정죄와 조롱과 매 맞음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즉, 자신의 주변을 돌아볼 수 없는 극한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구원을 간구하는 죄인의 손길을 보시고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과 자비의 손길은 상황을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구원을 간구하는 모든 인간에게 친히 구원을 약속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오늘 나는 간절하게 주님을 부르고 있습니까?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절하게 구하고 있습니까? 슬픔과 고통의 자리, 심판과 멸망의 자리에서 저주의 대상이 된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순절 제30일 - 4월4일(화)/ 요19:25-27/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가상칠언 세 번째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는 모진 마리아를 향하여 남기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좇아서 갈보리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예수님은 죽음 직전에 자신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육신의 모친 마리아를 제자에게 친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모진 고통과 아픔을 친히 당하시면서도 자기 자신의 고통과 아픔 속에 매몰되어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괴로워하며 비탄에 잠겨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제자를 새로운 아들로 소개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이별하는 아픔을 견디어야 하는 모친 마리아를 향하여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묵상할 때에 혹 나 자신의 고난에만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이 고난 중에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고난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며 고난당하는 사람, 소외된 이웃의 친구가 되는 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제31일 - 4월5일(수)/ 마27:45-46/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가상 칠언 네 번째 말씀은 버림받은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는 말씀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이 절규는 시편 22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시편과 예수님의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의 메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모든 죄를 대신하는 참 인간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십니다. 이 단절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외치셨던 시편 22편은 절규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두 번재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희망"입니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

  인생을 살다가 탄식과 좌절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주님과 단절된 것처럼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또한 누군가가 옆에 있어서 잘 견디고 이겨 낸 적이 없었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의 시편 22:1과 같을지라도 항상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인생에는 항상 시편 22:22-31의 희망이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십자가는 나의 희망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사순절 제32일 - 4월6일(목)/ 요19:28-30/ 내가 목마르다 

오늘 말씀은 가상칠언 다섯 번째 말씀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육신의 몸을 지니신 연약한 인간의 모습, 타는 목마름으로 인해 절규하며 고통 가운데 계신 예수님으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주님이 외치신 "내가 목마르다"라는 절규에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시편 69편에서 예언하고 있는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성취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이 시편 69:21은 요한복음 19:29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절규는 구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오성과 신실성을 확인하게 해 줍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의 아들, 즉 온전한 인간 예수로서의 절규입니다. 이 절규는 온전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통의 깊이를 알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머리를 숙이사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은 물과 피를 모두 쏟으셨기에 겪으신 고통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목마름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인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고난에 집중하며 묵상해 봅시다. 갚을 수 없는 그 은혜에 온 힘을 다하여 감사를 드립시다

사순절 제33일 - 4월7일(금)/ 요19:28-30/ 다 이루었다 

가상칠언 여섯 번째 말씀은 '사명의 완성을 선언하신 승리의 말씀'이자 '예언 성취의 선언'입니다. "다 이루었다"의 헬라어 원어인 '테레오'라는 말은 '다 마쳤다','다 완수했다','다 응했다'라는 뜻으로서 희생사역의 완성과 대속사역의 완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고 화목제물이 되셨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구약 성경 속에 예언되어 있는 "모든 예언의 성취"를 의미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만드신 길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의 길을 향해서 소리치고, 조롱하며, 채찍질하고, 침을 뱉기까지 무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들어 주신 구원의 길, 이 길에 대하여 나는 어떤 주장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무 지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지는 않습니까? 감사 없이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격도, 권리도 없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순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 주신 이 과분한 은혜에 어떻게 보답하시겠습니까

사순절 제34일 - 4월8일(토)/ 눅23:44-49/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오늘 말씀은 가상칠언 마지막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자기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의탁의 말씀과 함께 성소의 휘장은 찢어졌습니다. 해도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서 가만히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휘장을 찢으시고 한걸음에 달려 나오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들의 죽음조차 감내한 사랑으로 인간을 향해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관계를 충분히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도 우리 삶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의탁을 믿는 자들의 신앙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은혜에만 죄인인 내 전 존재를 맡길 때, 내 자아를 붙들지 않고 예수님께 내어 드릴 때, 휘장 너머의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주십니다. 걱정과 두려움을 붙들고 있느라 자신을 주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손익을 계산하고 상황에 따라 철회하려는 유혹을 놓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붙든 것들을 놓아 버리고 나의 모든 삶의 여정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믿음을 구합시다.

사순절 제35일 - 4월10일(월)/ 마16:13-21/ 고난, 죽음, 부활을 예고하심   

오늘의 본문에는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는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고백을 기뻐하시며 이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며 앞으로 겪게 될 중요한 일들을 알리십니다. 또한 앞으로 예수님의 고난을 목격할 제자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 없이는 예수님의 죽음도, 다시 사심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혹독한 핍박과 시련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합니까? "주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진정한 믿음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믿는다'는 고백은 그리스어로 '심장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신앙의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으며 매일매일 신앙고백 위에 살아야 하겠습니다. 고난 중에 있든지, 폭풍 전야 가운데 있든지 주님은 나의 유일한 구원아이시며,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나의 주님이심을 고백한다면, 고백한 대로 역사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시며 세상에서 넉넉히 이길 힘을 주실

사순절 제36일 - 4월11일(화)/ 마16:22-28/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항변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세우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신 기독교 정신은 이 땅의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혹독하게 꾸짖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복이 있다'는 말씀을 들은 만큼 훌륭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조차 순식간에 사람의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을 수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 하나님의 일에 힘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일, 곧 이 땅에서의 번영과 만족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까? 주님의 제자로 서기보다는 이 땅의 권력자 앞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부인하기보다는 타협하거나 묵인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은 나의 이런 모습을 단호하게 꾸짖으시며 십자가의 길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서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나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다시 한번 나의 신앙을 점검하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37일 - 4월 12일(수)/ 요12:1-8/ 나에게 가장 귀한 향유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것으로, 이것은 당시 노동자들의 1년 치 수입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마리아가 얼마나 값진 것을 주님께 드렸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장례 풍습에서 시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기름을 사용했는데,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것을 모두 쏟아내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이 헌신과 사랑을 주님만이 아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은 이 일에 대해 분개하며 허비한다고 책망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장례를 준비하는 마리아의 사랑을 받으시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일도 말하여 기억하게 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할 수 없으며, 이 모든 이들을 위해 죽음의 길을 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값진 향유를 준비했습니까? 나의 전부를 드려도 부족함이 없는 그 마음의 고백이 있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그 것은 낭비다, 합리적이지 않다"라고 말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주님게 드릴 용기와 결단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사순절 제38일 - 4월 13일(목)/ 눅22:14-20/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 세우심과 인간의 언약 파기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반복적인 악순환의 고리를 단번에 끊고자 하십니다. 바로 그 분의 피로 새로운 언약을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보혈로 영원한 언약을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잡히시기 전 날, 주님은 제자들과 한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식탁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손수 잔과 떡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요 너희를 위하여 붓는 내 피라." 선언하셨습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은 그분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의 죄와 죽음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희생과 새 언약의 의미를 바로 성찬을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나는 성찬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절기 행사, 또는 연례행사처럼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성찬의 의미를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대하는 감격과 감사가 내 안에 넘치기를 사모합니다. 그리하여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찬식에 나가는 내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거룩과 감사함으로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제39일 - 4월 14일(금)/ 막15:33-39/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향하여 서 있었습니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예수님의 옆이나 뒤가 아니라 바로 앞에 서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보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당시 관례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국가종교에서 예배의 대상이었던 로마의 통치자에게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군중심리에 들떠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할 때,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주목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가 많은 비난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는 소리가 많습니다. 이러한 비난과 유혹의 소리를 들을 때 내 마음은 어떠합니까? 일터에서, 세상에서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하하고 깎아내리는 현실 속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백부장과 같이 십자가 바로 앞에 서 봅시다. 내 눈앞에 놓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해 봅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이 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한 죽음이었으며, 온 세상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신 죽음이었음을 믿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한 백부장의 고백처럼 "주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세주입니다."라고 고백해 봅시다.

 

 

 

 

 

 

 

 

 

 

 

 

 

 

 

사순절 제40일 - 4월 15일(토)/ 막15:42-47/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제자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 요청했습니다. 이 일은 자신이 예수 및 그 추종자들과 한 무리임을 인정하는 것이었기에 '존경받는 공회원'의 신분인 그로서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잘못하면 예수님과 같은 죄목으로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을 맞이할 수 있었음에도 그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던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께서 미리 예언하신 대로 모든 자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에게는 죽음을 초월한 담대한 행동이 따릅니다. 성경은 그를 존경받는 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경의 예언된 말씀대로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제자들처럼 현장을 떠난 것은 아닙니까? 주위의 시선 때문에 꺼리거나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증언해야 합니다. 또한 인간으로 오신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담대하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의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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