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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대림절의 깊은 묵상
임현희 2024-11-30 추천 0 댓글 0 조회 586

대림절이란?대림절이란 성탄절을 맞이하기 전4주를 의미합니다.대림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심과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완성해 가시는 주님을 묵상하며,기쁨의 성탄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 121(주일294장 9:1-7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하시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소망의 빛 가운데로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어깨의 무거운 멍에를 내리시고

우리 인생의 무거운 채찍과 거친 막대기를 꺾으시고

우리 인생에 한 아기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그 이름 기묘자, 기 이름 모사, 그 이름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이름, 평강의 왕, 아버지 하나님

그 영광의 빛으로 우리 인생의 어둠을 몰아내시니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 모든 것을 이루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선하신 열심 속에 늘 살게 하여 주소서

 

 

122() 29811:1-9 이새의 줄기에서 솟아나는 희망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먼저 3-4절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한다. 위정자들은 눈에 보이고 들리는 대로 무분별하게 심판하고, 불의와 부패는 세상 가운데 가득했다. 당시의 혼돈 가득한 세상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신다. 세상 가운데 임하는 메시야는 처음부터 광대한 모습으로 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사야는 메시야의 오심을 줄기에서 한 싹이 나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하는 모습으로 기록한다(1). , 메시야는 매우 작은 모습으로, 마치 겨자씨와도 같은 모습으로 임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는 과정은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 가운데 임할 메시야는 권세를 힘입어 우주적 통치를 하게 된다. 그 땅은 공의와 성실이 역사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5). 그리고 그 세상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한 나라가 될 것이다(9).

깊은 묵상/ 이사야 11장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라고 말씀하며,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윗도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기 전에는 볼품없는 이새의 막내아들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을 때, 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큰 것을 바라고, 더 이루길 바라고, 더 완성하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작은 것, 낮은 것, 부족한 것, 실패한 것에서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작은 가지에서 싹을 내고 가지를 낼 것이며, 자라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아기 예수님을 가장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나의 작음, 나의 약함으로 아프십니까? 내 손의 적은 떡과 물고기로 내가 많이 부족하다 생각하십니까? 이새의 줄기에서 솟아나는 한 줄기의 희망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삶은 하나님의 열심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 삶의 상처와 아픔 때문에 슬퍼하기보다, 오히려 나의 삶이 작아서 희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늘 희망이 있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내 삶의 가장 낮고 가장 작은 것 속에 하나님의 희망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기도/ 오늘 가장 작고 가장 약한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희망을 품게 하소서.

 

123() 29940:1-11 나의 위로가 너의 마음에 가닿기를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본문은 범죄한 백성들이 포로가 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포로 된 자들은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자들에게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로를 선포한다(1-2).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사하였기 때문이다(2). 이제 그들은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3). 3절은 신약시대 복음서 저자들이 메시야의 등장을 선포하면서 인용했던 바로 그 본문이기도 하다(1:3 참고). ''은 메시야가 걷게 될 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분의 삶과 사역을 포괄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날 때 모든 육체는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5).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홈 많고 연약한 존재임에 분명하다(6-8).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8).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권세 있는 자로 임하시며, 권능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다(10). 그 팔은 구원 약속을 성취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능력이다.

깊은 묵상/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고 들려오지 않는 소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안 들려오면 그만인데, 하나님은 내 백성의 마음에 나의 위로가 가닿도록, 소리쳐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의 노역의 때가 끝났고, 너희의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고 외치는 나의 말이, 너희의 귀에 꼭 들리게 해 달라고, 내 백성의 마음에 가닿게 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이들의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삽니다. 서로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우리의 사이에 광야와 깊은 골짜기를 두고 삽니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의 소리를, 남편은 아내의 마음의 소리를, 자녀들은 부모의 마음을, 부모는 자녀들의 마음을 서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삽니다. 그렇게 우리가 꼭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는 단절된 세상에서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그 위로의 소리도 듣지 못하고 삽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도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계신데, 우리가 못 듣고 '외롭다-..' 하면서 삽니다. 대림절은 그 영원한 하나님의 위로에 우리 귀가 열리는 절기입니다. 거리의 소음과 우리 마음의 소음이 넘쳐나는 시대에 하나님의 위로의 노래가 우리 마음에 닿게 되기를 하나님께서 정말 바라고 계십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오늘 하나님의 위로가 당신의 마음에 닿고 있습니까?

기도/ 오늘의 삶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듣고 나누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124() 45952:1-12 흑좋은 소식을 들고 오는 그 발소리가 들리는가?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오늘 본문 앞 장인 이사야 51장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나와 있다. 하나님께서 분노의 잔을 거두었고(51:22), 그 잔을 예루살렘을 괴롭게 하던 원수들에게 넘기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 백성이 해야 할 일은 깨어나는 것이다(52:1). 그리고 그들이 이제 전해야 할 것은 '좋은 소식'이다(7). '좋은 소식'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포위된 성읍을 구하러 오신다. 이사야의 묘사대로 마치 파수꾼이 전쟁에서 기쁜 승리의 소식을 가져오듯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과거 예루살렘은 황폐했던 곳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고 희망이 사라졌던 바로 그곳에 기쁜 소리와 찬양이 회복된다(9). 이 좋은 소식은 칠십인역 성경에서 헬라어 유앙젤리은'으로 번역되는데, 이 단어가 훗날 신약성경에서 복음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사야 본문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더욱 분명히 와닿는다. 이 좋은 소식은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그리스도가 선포하는 복음을 통해 온전히 임할 것이다.

깊은 묵상/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그의 책 [월든]에서 "땅 속에 웅크리고 있던 얼음이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봄이다. 이것이 있은 다음에야 꽃 피는 푸른 봄이 뒤따르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얼음이 빠져나오고 그렇게 언 땅이 녹으며 봄이 온다는 것입니다. (

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은행나무, 2011).

그런 소리가 우리의 유년에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오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린 시절의 봄은 늘 단단하게 얼었던 땅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왔었습니다. 개천을 완전히 뒤덮었던 얼음이 봄의 바람에 밀려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반가운 봄이 왔었습니다. 그렇게 언 땅이 녹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적막하던 개울에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면, '! 봄이구나! 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좋은 소식도 그렇게 우리에게 들려온다고 외칩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좋은 소식을 들고 메마른 땅 가파른 언덕, 험산 준령을 넘어 달려오는 자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노래합니다. 오래 기다리던 그리운 소리, 그 반갑고 좋은 소식을 들고 오는 평화의 노래가 해마다 대림절이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오늘 우리 인생에 들려오는 그 좋은 소식, 복음을 들으며 살고

있습니까?

기도/ 오늘 우리가 이 반가운 평화의 복음, 그 위로의 발걸음을 듣고 살게 하소서.

 

125() 30461:1-11 오늘 포로되고 갇힌 자들에게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본문은 여호와께서 흑암에 놓인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 메시야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신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첫 설교에서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기 위해 인용하는 본문이 바로 오늘 읽은 이사야 말씀이다(참고 눅 4:16-21). 이사야의 선포에 의하면, 메시야가 회복시킬 대상은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간힌 자, 슬픈 자 등으로(1-3) 모두 억눌린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은 그 회복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4-11). 특히 4절은 황폐한 예루살렘의 회복을 노래한다. 4절 이후 이야기는 그 회복된 곳에서 살게 될 택할 받은 백성의 영적 회복에 대한 선포다. 이제 이스라엘은 메시야가 회복할 복된 나라를 꿈꾸며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깊은 묵상/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1-2절을 읽으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나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 같힌 자에게 자유와 놓임을 선포한다고' 말씀하시며(4:18-19)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슬픈 자를 위로하고, 오래 황폐한 곳을 다시 쌓을 것이라고, 너희 포로된 자들을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로 삼겠다고 말씀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회당에서 선포된 예수님의 이 첫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큰 희망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누가 복이 있습니까? 오늘 복이 있는 사람, 오늘 가슴에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는 사람은, 오늘 자유도 없고 놓임도 없고, 오늘 내 안에 상한 것들이 너무 많아 삶이 황폐하고 슬픈 사람입니다. 슬픔과 눈물이 가득한 내 삶의 자리가 도리어 예수님 앞에서는 희망인 것입니다. 오늘 내 삶의 모든 문이 닫혔을때, 도리어 하늘로부터는 문이 열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오늘 포로 되고 갇힌 내 삶의 머리 위로 열려 있는 하늘 문을 보고 계십니까?

기도/ 오늘 내 삶에 아무리 눌림이 있어도, 주의 은혜의 해를 소망하며 살게 하소서.

 

126() 3105:1-12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는 3장 분량으로 구성된 상당히 긴 설교다. 이중 처음에 등장하는 팔복 설교는 예수님의 사역 방향과 메시지를 가장 잘 담고 있는 선포라 할 수 있다. 산상설교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기존의 가치관과 종교적 관념이 전복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되고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팔복 선포가 그러한 내용들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팔복 설교 속에서 복받는 자들의 면면은 기존 세상에서 희망을 상실한 자들이었다, 또한 너무 온유하고 청결해서 치열한 세상 속에서 보상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었다. 기존 사회의 성공 방정식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고, ', 박해, 거짓, 악한 말'(11)의 위협 속에 놓인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새로운 희망을 전하신 것이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그들에게 열린다.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는 하늘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큰 상이 있기 때문이다(12)

깊은 묵상/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무리(오클로스)'의 성격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들 중에는 그냥 예수님의 기적이 좋고, 가르침이 좋은 이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온 힘을 다해 예수님을 따랐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제자들을 향해 팔복을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이 있다, 복이 있다. 너희에게 복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며 긍휼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을 가져가고, 복을 쟁취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희망도 없어 보이고, 너무 유약하고, 치열한 세상 속에서 자기 몫의 복을 챙기기엔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입니다. 화평을 위해 살며 의를 위해 박해를 받아도, '복이 있을 거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주는 나의 복이며, 너희의 상이 하늘에서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이 있다. 기대하고 즐거워하라.' 이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기쁨이 넘치길 바랍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세상의 복과 다른 하나님의 복이 나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있습니까?

기도/ 하나님의 복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하소서.

 

127() 3123:1-6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본문은 손 마른 자에게 예수님이 희망을 전해 주시는 이야기다. 손마른 자가 당시 처했던 어려움은 매우 컸다. 병의 원인이 죄라는 당시의 편견 때문에 그 병사는 공동체의 중심에서 함께할 수가 없었다. 늘 자신의 마른 손을 숨기고 살아야 했고 사람들 곁으로 가지 못했다. 희망을 상실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병자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양산해서 병사들의 희망을 앗아간 종교 제도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안식일 법으로 대표되는 유대 율법이 그러하다. 율법 자체는 매우 거룩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이 거룩한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었던 수많은 종교 계명들은 오히려 연약한 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요인으로 변질되었다. 그 율법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들은 죄인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전해 주신다. 특히 그러한 종교 질서가 가장 집중된 안식일에 그 일을 행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참뜻을 알게 하시고, 손 마른 자에게는 회복을 선물하신다(5).

깊은 묵상/ 매서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 그러나 그 겨울이 아무리 혹독해도, 겨울은 봄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봄이 저만치 오면 겨울은 조금씩 밀려납니다. 우리 인생에도 그런 겨울이 있습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삶이든, 겨울 같은 인생의 한 부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인생이 한겨울이라도, 한 아기가 오심으로, 우리의 겨울에도 봄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거기에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66절은 그가 오른손이 마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그러한 질병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었기에 삶에 대한 의미도, 희망도 점차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 인생을 향해서도, 겨울의 한 가운데에 머물러 있지 말고, '내 앞에 일어서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를 사람들 한 가운데에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어려워 말고, 여기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자리는 여기야. 두려워하지 마. 여기 한 가운데로 나오렴." 말씀하십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고 잡아 주시는 내 삶의 마른 손은 무엇입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를 저의 삶의 한 가운데에 일으켜 세워 주소서

 

128(주일) 2002:2-5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주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세상 속에서 인도하시고

지켜 보호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 인도하심으로 우리가 악의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의 집, 성전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아가는 주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며 내 길의 빛이 되는 줄 믿사오니

하나님의 성전에서 살아가게 하시고

성전에서 나오는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바라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가는 주의 자녀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듦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그 세상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이 시간에 주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하루의 삶 동안 주님의 임재 속에 살게 하소서.

 

129() 57034:11-31 양떼를 찾는 목자 예수님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암울한 상황에 대해 지적하며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자들, 특히 백성을 챙기지 않고 자신들의 유익만을 챙긴 이스라엘 지도자를 책망한다(7-10). 그들은 목자로서 양떼를 돌보는 것에 소홀했다. 하지만 이제 여호와께서 흩어진 양떼의 목자가 되실 것이다(11-16). 특히 한 목자를 그들 가운데 세워 직접 양떼를 돌보게 할 것이라 약속하신다(23). 그 목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고다.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메시야는 그 백성의 왕이 되어서 세상을 통치하며 양떼를 친히 돌보게 될 것이다. 그때 세상에는 화평의 언약이 맺어진다(25). 메시야는 백성들의 삶을 친히 보살피고 돌보실 것이다. 이 땅에 선한 목자로 임하실 메시야는 자기 백성의 모든 필요를 돌보고 완전한 평화와 정의클 회복할 것이다. 주께서 약속하신 화평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모든 자들이 참된 안위와 위로와 평안을 경험하는 안전한 상태를 누리게 될 것이다

깊은 묵상/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많은 고을에서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오천 명의 사람들이 영적인 양식과 육적인 양식을 얻어 건강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그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그 마음을 본받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는 영적인 갈증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여전한 목마름으로 더 많은 것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을 바라보며,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마음은 목자이신 예수님이 양인 우리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화평의 언약을 세우신 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갈등이 많은 이 땅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화평을 세우고 전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됩시다.

묵상을 위한 질문/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무엇을 하겠습니까?

기도/ 오늘의 삶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1210() 46033:12-18 공의의 목자, 예수님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본문인 예레미야 33장은 회복에 대한 이야기다.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포로 귀환과 더불어 그들에 대한 회복을 약속하신다. 그들이 세계 열방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찬양이 될 것이며, 열방은 그 백성을 통해 놀라게 될 것이다(9). 이러한 맥락에서 회복의 메시지

는 오늘 본문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설명된다. 참된 목자가 자신의 양떼를 안전한 곳에 눕게 할 것이며(12), 여호와는 이스라엘 유다 민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14). 특별히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한 공의로운 가지'를 약속하신다(15).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날 것이고(참고 사 11:1),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일어날 것이다(23 : 5). '가지'가 장차 왕이 되어 세상을 지혜롭게 다스릴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의 공의로운 가지는 이 땅 가운데 정의를 회복할 존재다. 비록 예루살렘 성전은 훼파되였고 다원 왕조는 그 대가 끊어진 상태이지만, 하나님께서 새롭게 회복할 것이다. 그 희망의 약속을 예레미야가 전해 주고 있다.

깊은 묵상/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조국 대한민국은 과거에 비해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세계적인 위상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발전은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변화를 통해 사람들은 다양한 자신만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고, 사회도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변화된 사회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는 세대별 갈등, 남자와 여자의 갈등, 서로 다른 가치에 의한 갈등 등 많은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등이 점점 지속되고 심화되는 것은 "내 것은 옳고 너의 것을 틀리다"는 자신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 내 것만 옳고 상대방의 것은 틀렸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에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참된 공의는 다윗에게서 난 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말씀해 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실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모르는, 안개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의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올바름과 정의로 인도하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정의와 공의를 일상 속에서 예수님처럼 실행하고 있나요?

기도/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정의를 외치게 하소서.

 

1211() 36680:1-7 하나님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소서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시인은 이스라엘의 고통스러운 포로 생활 이후 하나님의 구윈과 회복에 대한 희망을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4).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지만, 더 나아가 온 우주를 통치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물론 현재 이스라엘 상황으로 보건대,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외면하고 계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4)라고 묻는 것이다 때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의 상황에 대해 방관하시며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실제 성서 기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이라고 기록하곤 한다. 얼굴을 숨긴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있어서 매우 두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인은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4)라고 묻는다.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회복을 간구한다.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고 구원이 임하길 간절히 소망한다(7).

깊은 묵상/ 독수리의 평균수명은 40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30년을 더 사는 독수리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30년을 더 살게 되면 무디어진 부리가 자라 목을 찌르게 되고 날개의 깃털이 무거워져 날지 못하게 됩니다. 날카롭게 자란 발톱마저 살 속을 파고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때 독수리는 결정합니다. 새 삶을 살 것인가? 그대로 죽을 것인가? 새 삶을 살기 위해 독수리는 부리를 깨뜨립니다. 암벽에 부리를 부딪쳐 깨뜨리고, 새로운 부리가 날 때까지 먹을 것을 포기하는 과정을 견딥니다. 그리고 발톱을 뽑습니다. 날개의 깃털을 뽑아내고 새로운 깃털이 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러고 난 뒤 독수리는 새로운 삶의 문을 열게 됩니다. (정호승,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J, 비채, 2013).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세상의 다툼거리와 같이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시인이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라고 질문하며 하나님께 구원과 회복을 간구합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삶을 위해 우리의 것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을 온전히 바라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나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이 필요한 영역은 어디인가요?

기도/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1212() 311:46-55 오시는 하나님의 나라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본문은 마리아의 찬가다. 마리아는 세상 가운데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찬가의 핵심은 장차 이 땅에 태어날 메시야가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 그리고 멸시받는 자를 돌보시고 함께하신다는 내용이다. 오늘 본문은 두 개의 대조적 흐름으로 진행된다. 높은 자와 낮은 자의 대조다. 높은 자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등장한다: 교만한 자(51), 권세 있는 자(52), 부자(53). 반면 낮은 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두려워하는 자(50), 비천한 자(52), 주리는 자(53). 정리하자면 마리아는 지금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아지는 새로운 세상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누가복음은 이러한 마리아의 찬가를 기반으로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서술한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모습 자제가 매우 낮온 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높아지실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노래는 단순히 낮은 자를 위로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동안 높은 자가 세상을 지배하며 흐려 놓은 사회질서를 장차 태어날 메시야가 바로잡고 회복할 것이라는 소망의 고백이다.

깊은 묵상/ 한민 교수가 쓴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한민 교수는 한국 사람에 대해 "주도성이 강하다"고 평가합니다. 주도성이 강하기에 이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운동이나 게임을 잘합니다. 하지만 주도성이 강하면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여 이래라 저래라 참견을 하는 경우도 많고, 그로 말미암아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유발하기도 합니다(한민,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 부키, 2022)

이러한 한국인의 정서와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사회적 갈등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념 갈등, 지역갈등, 계층 갈등, 남녀의 갈등이 더욱 심해지고 깊어집니다. 마리아의 기도에 나오듯이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자와 두려워하는 자, 비천한 자, 주리는 자로 니누어지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기다립니다. 대림절에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는 나라와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긍홀하심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짐으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우리는 일상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하며 기다리고 있나요?

기도/ 우리의 삶에 긍홀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임하게 하소서.

 

1213() 1051:67-79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라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본문은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리는 사가랴의 예언에 해당한다. 사가랴는 백성을 구속할 구원자가 오실 것이고, 자신의 아들 요한이 그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 예언하고 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실제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실현되고 있는 상황이었다.그래서 그의 아들 요한이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거대한 구원역사 가운데 그 거룩한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예언한다(76). 사가랴의 아들 요한이 예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더불어 하나님의 긍휼을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 앞에서 선포하는 것이다(77-78). 이제 메시야의 오심으로 인해 세상은 어둠과 죽음에 놓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평강의 길이 임하며 이 땅 가운데 참된 평화와 공의가 실현될 것이다. 세례 요한이 감당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의 임무이기도 하다.

깊은 묵상/ 대림절은 겨울과 함께 시작됩니다. 겨울이 되면 나무는 열매를 모두 내어 주고, 자신은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만 내어놓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가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나무는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다음 해 열매를 맺기 위한 준비, 삶을 위한 준비를 합니다. 주기와 나뭇가지에 힘을 빼는 대신 보이지 않는 뿌리에 힘을 주고, 내년을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구약과 신약의 사이를 연결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도인 우리는 하늘과 이 땅을 연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 준비는 겨울의 나무처럼 겸허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비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비움의 시간을 가지기를 소망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며 내 안에 비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며 나의 것을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하소서.

 

1214() 966:20-26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질서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복음서에 등장하는 복에 대한 설교 중 마태복음 팔복 선언과 더불어 눈여겨볼 설교가 오늘 본문이다. 다만 마태복음과 차이가 있다면, 누가복음에서는 4번의 복을 선포한 이후 4번의 화를 선포한다는 것이다. 먼저 복에 대한 선포의 대상은 다음과 같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미움을 받는 자(20-22). 이들에게는 복이 있다고 선포되고(22)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라고 선포된다(23). 반면 화를 받는 자는 다음과 같다: 부요한 자, 배부른자. 웃는 자, 칭찬받는 자(24-26), 예수께서 복 받는 자와 화 입을자를 구분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역설, 즉 패러독스라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기존의 모든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된다.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모습이다. 부자와 거지 이야기에서 강조되듯(16:19-31) 가난한 자가 높임을 받고 높은 자가 낮아지게 된다. 기존의 세상 질서와 가치가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는것이다.

깊은 묵상/ 오랜 농경사회에서는 지긋이 나이 드신 분들의 경험에 기반한 지혜가 디음 세대에게 삶을 살아가는 데 쪽 필요한 혜안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들은 장로(나이 드신 분)들을 향한 경외감이 있었고, 그들을 공경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장로들의 지혜는 컴퓨터와 시로 대체되었고, 정보가 권위가 되는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그로 인한 세대 간의 갈등이 점점 가속화되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고, 그 패러다임에 의해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가치와 전혀 다른 가치를 말씀합니다. 경험의 가치, 정보의 가치로 비견되는 세상의 가치가 성도를 안녕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가 인간을 구원의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가치가 담긴 새로운 질서를 바라보며 대림절을 지내야 하겠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오늘날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는 무엇일까요?

기도/ 이 땅을 살면서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1215(주일) 17112:1-6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힘이시며

나의 생명의 물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목마름을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마시게 하셨고

주님이 물과 피를 쏟으심으로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목마른 영혼들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으로

애달픈 인생들을 찾아와 주소서

 

주님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대림절 이 아침에

주님의 보혈이 온 천지를 덮고

주님의 눈물이 온 인생에게 흘러 평화를 얻게 하옵소서

우리로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물을 길어 마시게 하소서

 

1216() 426103:8-18 약함을 아시는 사랑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본문은 다윗이 지은 시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동안 보여 주시고 행하셨던 일들을 찬양하며 감사 고백을 하고 있는 내용이다. 다윗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우리 병을 고치시고 인자와 긍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다. 물론 때로 노하실 때도 있긴 하지만, 그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는 분이다(9).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시고 긍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12, 13).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데, 다윗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작은 먼지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한다(14). 그만큼 우리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광대하신 하나님 앞에 선 우리는 티끌과도 같은 연약한 존재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 삶을 세밀하게 살피신다. 그리고 우리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계신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은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연약함을 다 덮을 정도로 위대하다.

깊은 묵상/ 긍휼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이를 잉태하게 되면 어머니는 연약한 생명을 위해 조금이라도 해로운 것은 피하려고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머니는 자신을 꾸미던 예쁜 옷과 액세서리도 혹시 아이에게 해가 될까 피하고, 자신의 자존심도 희생하며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는 옷을 입고 육아에 힘을 쏟습니다. 아이가 자라면 부모님은 아이가 혹시라도 나쁜 친구를 사궐까, 좋지 못한 것을 접하게 될까 염려하여 아이의 친구를 살펴보고, 아이가 보는 것들을 단속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해로운 죄를 멀리 옮기고 싶어 하십니다. 죄의 영향력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죄의 결과가 우리 영혼을 죽음으로 내몰까 걱정하십니다. 아직 연약한 아이들이 해로운 것을 구분하고 피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죄를 피할 능력이 없음을 아시고 그 약함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온전히 다 덮어 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우리가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 오늘의 삶에서 죄를 멀리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1217() 2928:31-39 끊을 수 없는 사랑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바울이 로마에 보낸 편지에는 율법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상황은 율법을 근거로 서로 정죄하는 가운데 편협한 구원관이 팽배해 있었다. 율법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적용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서로를 정죄하는 데 급급했다. 율법의 부작용이 나타났던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한다(1:16-17).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인해 우리가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이다(2). 그러므로 성도들은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고 죄의 노예로 살던 우리 모두를 자유케 하셨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정죄로 인해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39).

깊은 묵상/ 길은 가다가 옛 동창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 무척 반갑지만, 헤어지고 나면 또 언제 만날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집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직장을 다니다가 옮기며,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하면서 가까웠던 사이가 멀어지기도 하고, 또 기억 속에서 잊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관계는 그렇게 쉽게 끊어질 관계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피를 나눈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보다도 더 강력하며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어 하나님을 떠나더라도 여전히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처럼 우리와의 관계를 지속하려고 기다려 주십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 사탄은 하나님과 우리의 이러한 관계를 질투하여 고난과 사건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이 관계를 끊고자 애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관계는 그 어떠한 것으로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관계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떠나가토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십자가로 관계를 더욱 든든히 엮어 주십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도/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하소서.

 

1218() 2873:1-21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본문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담고 있다. 니고데모가 어두운 밤에 빛 되신 예수님을 몰래 찾아온 셈이다(2).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그의 질문은 거듭남에 대한 내용이었다. 니고데모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이 진행되면서 예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자신도 하늘로 들려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13-14).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과 더불어 하늘로 영광스럽게 승천하게 되실 일에 대한 예고다. 이러한 일들, 즉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고 또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 모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16).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를 보내셨던 것이고, 그토록 사랑하셨기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다(17). 하나님은 참사랑이시다.

깊은 묵상/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광야 길에서 불평하다가 백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믿지 않고 거스르는 이들에게도 다시 살 기회를 주시기 위해 모세로 하여금 구리 뱀을 높이 올려 이를 본 사람은 살도록 하셨습니다(21 :4-9). 이스라엘의 학자였던 니고데모는 논리적이고 합당한 답을 찾아다녔지만,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위해 보내신 독생자이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뱀에 물려 죽을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구리 뱀이 높이 달렸던 것처럼,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형틀에 높이 달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죄의 결과인 죽음을 면하고 영생을 누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오늘 우리는 성령님이 그 사실을 알게 하심으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열어 주신 새로운 삶, 즉 영생의 삶을 깨닫는 믿음의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도록 하셨을까요?

기도/ 나의 지식과 생각을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소서.

 

1219() 90요일4:7-17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요한1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권면하는 편지다. 저자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10). 그 증거는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던 사건에 근거한다(10). 성탄의 은혜롭고 신비로운 사건이 요한서신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을 이루기 위해 희생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먼저 주어졌는데, 우리가 진정 그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수직적인 사랑이다.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사랑이다. 이제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은 수평적인 관계에 있는 우리 이웃과 사랑을 니누어야 한다(11). 서로가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고, 우리도 그의 사랑 안에 존재하게 된다(12).

깊은 묵상/ 짝사랑은 나 혼자 사랑하는 것입니다. 외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을 듣게 되면 더 이상 짝사랑이 아님을 알게 되고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사랑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더 먼저 사랑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내가 더 사랑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더 사랑하며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창세전에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랑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그 희생의 대가가 너무 커서 우리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랑의 길이가 너무 길어 우리가 전혀 가능하지도 못했습니다. 알고 보니 오늘 우리가 가진 작은 사랑도 바로 그 사랑의 큰 물줄기에서 흘러내린 몇 방울에 불과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 3년간 예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승천하신 후 성령님을 통해, 자신이 받은 사랑은 단지 3년간의 사랑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시작된 사랑이며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실까요?

기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1220() 220고전13:1-13 완전한 사랑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보내는 사랑에 대한 권면이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공동체 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내분과 갈등, 그리고 분열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다. 특별히 은사에 대한 문제가 고린도교회 공동체 가운데 심각하게 대두되었다(12). 다양한 은사가 존재하고 있었고, 그 모든 은사에 각각의 가치가 있었지만. 성도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정 은사가 다른 은사들보다 더욱 가치 있다고 여기며 교만해져 갔다. 대표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그러했다. 바울은 그런 자들을 향해 권면하기를, 아무리 좋은 은사가 있다 할지라도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소용없다고 이야기한다(13). 아무리 아름다운 기도라 할지라도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마치 '꽹과리'(1) 같은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13).

깊은 묵상/ '사랑'의 위대함은 이 세상의 어떤 기적과 능력으로도 견줄 수 없습니다. 사랑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때로는 겸손하고, 때로는 인내하고,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그 모든 능력을 다 사용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조용히 죽음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연약한 육체 속에서도 드러냈습니다. 성숙한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어린아이들의 사랑은 순수하지만 그 표현 방식이 아직 서툽니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질투로 나타나기도 하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투정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미성숙한 사랑조차 다 덮어 주시고 마침내 완전한 사랑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을 더 알면 알수록 희미한 신앙이 뚜렷해지면서 우리의 사랑은 한 단계 더 성숙해집니다. 그리하여 요란한 꽹과리 소리와 산을 옮기는 거대한 능력의 역사보다 주님의 얼굴을 보는 그 순간을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쁨을 누리는 완전한 사랑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나를 잠잠히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떠올려 봅시다.

기도/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1221() 101:26-38 순종으로 표현되는 사랑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본문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리아의 배 속에서 태어나게 될 예수는 다윗의 왕위를 받게 될 것이다(32). 또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다(32). ,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포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배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마리아에게 매우 감당하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게다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여인이었던 마리아 입장에서 이와 같은 메시지는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소식이었다. 마리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앞에서 놀라움을 표하지만, 가브리엘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역사의 위대함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 그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점이다(37). 메시야의 탄생은 모든 자연 법칙과 원리를 초월하는 사건이다.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하에 일어난 사건이다. 마리아는 그 선포에 믿음으로 응답한다(38).

깊은 묵상/ 마리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자신의 몸으로 몸소 느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긍휼은 히브리어로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뜻 그대로 마리아의 몸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이 이렇게 태어나도록 하셨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어린 소녀였던 마리아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정혼하였지만 아직 결혼생활을 시작하지도 않은 마리아에게 임신이란 사회적인 생명과 육체적인 생명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보다 태중 아기의 생명을 더욱 소중히 여겼습니다. 마리아는 그의 아름다운 결단이 온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신학적으로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마침내 순종의 대답을 들은 천사는 더 이상 그를 설득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기쁘게 돌아갔습니다. 마리아는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이 온 인류에게 흘러가게 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순종은 또

다른 사랑의 표현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이 온 세상으로 흘러 내려가도록, 구원의 우물물이 온 인류에게 흘러가도록 이끄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은 무엇입니까?

기도/ 주님께 순종합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들에게 흘러가게 하소서.

 

 1222(주일) 1041:18-25 임마누엘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심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약속이었지요

그 옛날 유다가 몹시 위태로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그 옛날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임마누엘이라 하신 그 이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이었지요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은

절망과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빛이요 소망이었습니다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라 하셨던 그 이름 예수님이십니다

 

1223() 1162:1-11 메시야 탄생의 신비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본문은 아기 예수 탄생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본문에서 눈여겨볼 점은 헤롯 왕의 분노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왕의 탄생 소식에 헤롯 왕은 강한 위협과 두려움을 느꼈다. 새로운 왕의 탄생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존의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이 땅 가운데 구축되는 것이다. 실제 예수 탄생 이야기는 기존의 예상과 공식과는 다르게 진행된다. 대표적으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점이 그러하다. 그 땅은 매우 작은 땅이다(6). 놀랍게도 메시야의 탄생이 그런 작은 고을에서 일어난다. 마치 겨자씨처럼 작은 모습으로 시작되지만, 이제 그 능력은 거대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런 아기 예수를 향해 동방박사들이 찾아간다. 당시 가장 높은 학식과 지위에 있던 자들이 최고의 선물을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께 바쳤다.

깊은 묵상/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구원자, 평화의 왕,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왜 세상을 그토록 술렁이게 했을까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의 많은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셔야 하는데,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온 인류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거대한 도시,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예루살렘이 아닌, 너무나 보잘것없는 가장 작은 시골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이 술렁이게 된 것은 새로운 왕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기득권자들의 특권 의식과 자리지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까지, 온 인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하며 최고의 선물을 올립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둘러싼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참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주 먼 길을 돌아 예수님에게 경배하며 선물을 드리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 일의 의미를 잘 알면서도 반응하지 않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죽여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왜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을까요? 그 이유를 예수님의 죽음(1:4)과 부활(14: 9)을 통해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세상을 떠들썩하게 다시 오실 예수님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기도/ 참민음은 행하는 것이요. 참사랑은 베푸는 것임을 잊지 않고 살게 하소서.

 

1224() 2011:1-14 말씀이 육신이 되다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요한복음이 예수 탄생을 전하는 방식은 공관복음서와는 사뭇 다르다. 마태와 누가는 마리아를 통해 인간의 육신을 입고 태어나는 아기 예수의 탄생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한복음 도입부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던 하나님(1:1)을 연상케 하며, 실제 '태초에'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하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1).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류 구원의 큰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한은 어둠과 빛을 대조하며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선명하게 고백한다(4, 9). 하지만 세상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11). 그러나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임하게 될 것이다(12).

깊은 묵상/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속에 여러 번 찾아오셨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에덴으로 찾아오셔서 네 자리가 어디인지 물으시고, 그 자리를 회복하라는 변화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변화는커녕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갔습니다. 에덴에서 아담을 찾으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아담의 후손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도망간 인간, 범죄한 인간들에게 왜 그토록 찾아오셨을까요? 도망간 인간들, 범죄한 인간들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포기하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에게는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죄를 짓고 도망하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도망간 인간, 바로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는 죽음입니다. 이러한 분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오심은 인류 역사의 대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에 계획하신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선언은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실 창조주가 이 땅에 오심을 선포하는 최고의 선언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면서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기도/ 오늘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겸손하게 하소서.

 

 1225() 1152:8-20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묵상을 돕는 본문 관찰/ 누가복음은 성탄의 소식을 처음 접한 사람이 목자들이라는 점을 묘사한다. 목자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대다수 목자들은 양떼를 돌보느라 안식일 율법조차 지킬 수 없었던 궁핍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메시야 탄생의 감격적 소식은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종교지도자들 혹은 막강한 힘을 가진 위정자들에 전해진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한 목자들에게 전해졌다. 이는 매우 놀라운 사건이 분명하다. 천사가 전해 준 소식에 목자들은 먼저 그 탄생의 현장으로 달려간다(15). 그리고 천사들이 전하여 준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를 그곳에 전한다(17). 엄밀히 말해 예수 탄생의 신비 속에 담긴 의미를 가장 먼저 들은 자는 목자들이었던 셈이다. 이어 목자들은 탄생의 감격을 영광과 찬송으로 보답한다(20). 이러한 목자들의 반응은 성탄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본이 된다.

깊은 묵상/ 인류 역사 이래 지금처럼 불안한 시대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 불안감은 개인을 넘어 국가적으로, 모든 인류 위에도 감돌고 있습니다. 올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나리가 떠들썩했는데, 108, A(인공지능) 대부'로 알려진 존 흡필드, 제프리 힌턴 교수가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했습니다. 제프리 인턴 교수는 A 기술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은 "A가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과학적 발전을 가속화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부정적인 측면은 "A가 통제 불능의 위협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신중하게 살펴봐야 한다."며 수상 소감을 밝혔습니다.

힌턴 교수의 말처럼 인공지능의 발달로 우리 삶이 편리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섭게 발전해 가는 과학기술 앞에 인류는 평화가 아니라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참 평화는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천 년 전 가장 낮은 곳에서 소망 없이 살아가던 목자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절망과 불안과 슬픔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아기 예수의 성탄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참 평화가 되십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땅의 평화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기도/ 나보다 연약한 이들을 돌아보며 나누고 베풀고 구제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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